Who am I ?!/Book2021. 7. 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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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정인진 지음)

 

I. 서론

이 책은 정인진 변호사가 총 5장에 걸쳐 오랜 세월 판사와 변호사로 일하며 답답해하고 분노하면서 직접 겪은 법조계 내부의 문제점들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원인을 진단했다. 오늘날 사법이 불신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를 저자의 체험에 기반하여 서술하며, 판사들의 내면 속 법관제일주의를 바로 세움으로써 국민주권을 지키고자 사법개혁을 주장한다.

 

II. 쟁송: 평생 한번 있기 어려운 일

일반사람들에게 쟁송이란 평생 한 번도 있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판사는 그런 쟁송을 해결하는 일을 밥 먹듯 해야 한다.

수사기관 또한 그렇다. 일반사람들이 피해자가 되어 경찰조사를 받을 일도, 피의자가 되어 현행범체포 될 일도 흔하지 않다. 그런데 수사기관은 그것이 늘 다루는 일이다보니, 매뉴얼대로, 패턴대로, 법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곤 한다. 모든 사건에 있어서 사건관계인의 감정까지 살피기는 쉽지 않다. 재판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듯, 그 전 단계인 수사도 예사로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저자는 판사가 사건관계인의 감정까지 살펴야한다고 서술하지는 않았으나, 수사기관으로서는 피해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피해회복에도 도움이 되어줄 수 있다면 국민의 신뢰를 쌓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반성을 하게 되었다.

 

III. 다양하고 이상한 판사의 사법철학

판사의 사법철학이 다양하고 때로는 이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저자의 대학 동기 변호사가 한 말은 나의 뇌리를 파고 들었다. “너는 판사가 재판을 이상하게 하면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러면 안돼. 그런 판사를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다른 변호사들한테는 그렇게 해도 너한테는 잘하게 할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아니면 그 판사한테 누가 약인지 찾아내든지. 그게 돈이 되는거야.”

법조윤리, 변호사의 윤리는 책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변호사는 돈 때문에 검사, 판사가 아닌 변호사업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밥과 벌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놓고 목숨이라도 건 듯 싸우는 재판에 있어서, 변호사는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판사의 다양하고 이상한 사법철학에 대해 의문을 갖기보다는 이용하려는 변호사의 시각을 너무도 명쾌하게 밝힌 저 말은 내 뇌리에 박혔다. 평소 수사기관으로서 변호사에게, 법관에게, 우리 사법체계에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었고, 이는 국민들이 우리 사법에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과 동일할 것이다. 어쩌면 국민들이 수사기관, 경찰에 느끼는 아쉬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의 결정을 이상하다고 하기 전에 사법경찰이 작성하는 송치사건의 의견서, 불송치결정서의 결정이유, 수사 중 작성하는 많은 수사보고서를 사건관계인이 바라보았을 때 수사관들마다 다양하고 이상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할 부분은 없을지 한번 더 고심해야겠다.

저자는 판사로서 법원을 떠나, 변호사가 된 후에 법을 보는 나름의 정치학에 눈뜨고 다듬게 되었다고 하며, 그로 인해 법대를 떠난 후의 삶이 그저 황잡한 돈벌이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경찰이라는 직업을 떠나기 전에 법을 보는 나름의 정치학에 눈뜰 수 있을까. 그렇게 올바르게 뜬 눈으로 국민들을 대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IV. 법관들에게 바라는 몇가지

1. 법 기속성의 긍정

저자는 과거 배석판사 시절에 형사사건 기록을 읽다가 증거로 보아 유죄인지 무죄인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기에 이걸 어쩌면 좋으냐고 선배 판사에게 물어본 바, “판사인 너도 유죄인지 무죄인지 모르겠다면, 그게 바로 무죄야.”라는 명답을 들었다고 했다.

판사만이 아니라, 수사기관의 수사과정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에 따르고, 아무리 고소·고발이 아닌 인지사건에 대한 수사라 하더라도 증거에 기반하여 공소권없음, 죄가안됨, 혐의없음 처분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의 인권을 보호해야할 수사기관이 자존심을 운운하며 무리한 수사와 기소를 강행하는 것은 아집이 될 뿐이다.

2. 법의 도구성에 대한 인식

저자는 법은 도구다.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법에 정해진 바와 다르니 잘못된 것이라는 등식으로 세상사를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법정의를 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을 도구가 아닌 실체적 개념으로 알면서 물신적 사고에 빠지면 이런 함정에 드는 것이 아닐까. 상식과 법리의 괴리는 정말로 피해야 할 일이다.

3. 법리와 판례의 맹종 문제

판례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을 “~에 부합하는 증거는 믿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라는 이유를 들어 잘라내, 두부모 자르듯이 사실관계를 이미 밝혀진 법리나 판례에 맞추어 결론을 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무정견을 키워가는 일 또한 주의해야 한다.

수사기관의 결정문 작성시에도 기존의 법리나 판례를 참고하며, 저자가 쓴 표현과 유사하게 피의자 또는 피해자가 제출한 증거에 대한 판단을 하곤 한다. 사건과 가장 유사한 판례를 찾아내는 게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결론을 먼저 내린 후 증거에 대한 판단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4. 법경제학적 시각의 필요성

단순히 누가 이기도록 판결해주어야 할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어떤 판단이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 검토하면서, 법원과 법관이 지도적 원리를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터파크사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사건 수사시 망분리 관련 형사상으로도 책임이 있는지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방통위의 과징금 처분 및 다른 IT업체들의 경각심 제고 등을 고민하였던 적이 있다. 결국 인터파크에 대한 45억원 과징금 처분은 확정되었고, 방통위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망분리 정책은 개선되었다. 한 사건에 대한 수사가 나라의 정책과 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V. 결론: 사법철학으로서 민주주의

법관의 사법철학은 사건에서 법관이 판단을 내리는데 바탕이 되는 사상이나 신념 체계를 말한다. 법관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그 가치관으로 해야한다.

헌법 제1조 제2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 원칙이 우리 사법에도 제대로 적용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전직 판사로서 판사들을 향해 법관들에게 바라는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수사기관의 입장에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면 좋을지 고민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 내 마음에 다가왔던 구절들

나는 엉터리 변호사가 미웠고, 엉터리 변론이 미웠다. 그러면서 점점 화를 잘 내는 재판장이 되어갔다. 법정에서 나는 숙제 안해 온 학생을 나무라는 선생처럼 당사자와 변호사를 채근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건의 승패, 내가 욕구하는 정의에 정작 당신들은 왜 이리 무심하고 게으른가. 이게 내 생각이고 내 태도였다. 순진하긴. 지금 생가하면 딱한 일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리 있는가. 성마른 성미라서 나는 숱하게 실수를 저질렀다. 악평이 돌았다. 지치고, 외롭고, 괴로운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잘못은 법정 언어의 위치성에 무지하면서 열정만 앞섰던 데 있지만,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이 책에 그 반성적 성찰을 담고 싶었다.

 

나와 같은 재판부에서 일했던 판사 한 사람은 내가 그리도 판사 일을 지겨워했다고 일깨워준 일이 있다. 그렇다. 지겨웠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웠다. 서로 억울하다며 상대방을 원인 제공자로 지목했다.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것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었지만, 누가 더 억울하고 누가 덜 억울한지, 누가 나쁘고 누가 그보다는 나은지 알기 어려웠다. 사람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서 소리 지르고 몸부리쳤다.

 

재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밥과 벌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놓고 목숨이라도 건 듯 싸우는 일이다.

 

법대를 내려오던 그날 나는 내가 정치적 자살을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모나이었다. 법원을 떠난 후에야 나는 법을 보는 내 나름의 정치학에 눈뜨고 그것을 다듬을 수 있었다. 그것이 정녕 정치적 자살이었다면, 그 후 나는 정치적 부활을 시도했던 셈이다. 그게 아니라면 법대를 떠난 후의 내 삶은 그저 황잡한 돈벌이에 지나지 않았을 게다. 구원은 뜻밖에 온다. 

 

판사의 사법 철학은 왜이리 다양하고 때로 이상할까. 이상한 재판장을 만나고 와서 내가 한탄을 늘어놓자 한번은 듣고 있던 대학 동기 변호사가 한마디 했다. "너는 판사가 재판을 이상하게 하면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러면 안돼. 그런 판사를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다른 변호사들한테는 그렇게 해도 너한테는 잘하게 할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아니면 그 판사한테 누가 약인지 찾아내든지. 그게 돈이 되는거야." 아닌게 아니라 그는 누구를 상대해서도 원만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듯 했다. 엉터리 변호사가 밉더니, 이젠 엉터리 판사가 미운 날들이 왔다. 싸움은 상대가 달라졌을 뿐, 끝난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만 내게 글쓰기는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변호사가 된 후 추사, 다산, 사마천, 공명에 관해서 짧은 글을 썼다. 그들도 모두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글을 썼다.

 

사건심리에서 보이는 조급성이나 부실은 대체로 법원의 구조적 문제다. 판사 개인이 죽어라 일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 미담이 재난을 이기지 못하는 거소가 같다. 사법자원의 확충만이 올바른 방책이다.

그러나 마구잡이식이거나 편향된 심리와 판결은 대개 개인의 일탈이거나 자질 부족이 문제다. 연임심사를 철저히 하고 법관 재교육과 징계 등 제재를 강화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길이다. 자신들을 '불명의 신성가족'으로 보고, 판결에 대한 비판이 사법권 독립의 침해가 될까 저어하고, 판결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있는 법조인들의 인식과 그런 도그마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누구든 법률가들의 이런 문제에 목소리를 내놓아야 할 일이다. 아니면 이 오만한 법조 카르텔이 영속할 것이다.

 

변호사는 영미식으로 말해 '법원의 역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사꾼이다. 남의 돈을 먹는 장사꾼은 눈치가 빨라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변호사는 사건을 생긴 대로 생생하게 보고, 거기에 맞추어 온갖 해결책을 궁리하고, 늘 실용적으로 사고한다. 외국어를 배워야 모국어를 제대로 알 수 있듯이, 나는 변호사가 되어서야 법이나 법원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법대에 앉아서도 법의 한계를 알고 그 너머 세계가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내려와보니 세상은 훨씬 깊고 넓었다. 그 황폐함이나 황잡함에도 끝이 없었다. 정글에서 아만과 오만은 죽는 길이다. 법과 판사 자리에 대한 내 존숭이 실은 아만을 낳은 원인이었음을 깨달았고, 아만이 걷히자 실체가 보였다. 먼저 사법과정과 사법작용이 사건 당사자와 일반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판사는 오만으로 망하고 검사는 공명심으로 망하고 변호사는 탐욕으로 망한다는 언설이 현실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았고, 판사·검사·벼호사의 욕망과 윤리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보고듣게 되었다. 쟁송 속에서만 보던 법과 정의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광의적 관점에서 그 위치와 기능을 생각하게 되고, 나아가서 법, 정의, 국가, 권리와 의무, 책임과 이익이 얽히고 작용하는 기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미셀 푸코가 말하는 '지배도구로서 감옥'이나 마사 누스바움의 '정의를 위한 사랑'을 관념을 넘어 현장의 상황으로 이해하게 된 것도 변호사가 되고 나서다.

판결은 항상 결론이 있다. 판결은 당사자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선언하는 문서다. 그 결론이 지니는 무게 때문에 법은 판결에 반드시 이유를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다(민사 소액사건에서는 예외가 있다). 이 점에서 판결은 다른 공문서와 많이 다르다. 판결의 이유는 대부분 길고 복잡하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판결 쓰기가 어려운 것은 결론을 내기 어려워서고 다시 그 결론을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기 어려워서다. 권력을 행사하되 글로 설득하라는 이 어려운 주문 앞에서 법관은 늘 전전긍긍한다. 마지막을 매번 도장 찍기로 마감하는 이 독특한 글쓰기 방식은 법관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런데도 법관이 판결 앞에서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비양심적이거나 신선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밥과 돈과 벌이는 필요불가결한 삶의 조건이다. 법정은 그걸 움켜쥐려고 벌어지는 피 튀는 싸움의 현장이며, 판결은 그 싸움에 나선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문서다. 이렇게 원초적 문제를 앞에 둔 처절한 다툼에 끝장을 내야 하는 판결 역시 에누리 없는 원초성을 띨 수 밖에 없다.

 

벌이란 고귀한 것이다. 실은 인간활동의 핵심이다. 그런데 벌이 중에 다소 특이한 것이 있다. 일컬어 프로페셔널인데, 본래 서양이 밟아 온 역사의 산물이다. 신사가 할 공부는 신학, 철학, 법학, 의학 네 가지였고, 신사가 가질 직업은 성직자, 교수, 법률가, 의사 네 가지였다. 프로페셔널은 이를테면 이런 자리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선생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교육 서비스의 수요자가 되어 돈을 내는 학생이 그 공급자가 되어 돈을 받는 선생에게 외려 자기가 공부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하는 것, 이런 짜임새가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다. 성직자나 교수나 법률가나 의사는, 그 역무의 소비자에게서 야단을 맞지 않는다. 외려 신도나 학생이나 의뢰인이나 환자를 야단치는 일이 많다. 내게 밥을 먹여주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도 더러운 꼴일랑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 구조가 아만을 키우는 것임을 안 것도 나이 들어서였다. 내 직업은 남과 다르다는 인식, 내가 하는 일은 고귀하다는 인식이 아만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이었다. 오십 넘어 변호사 개업을 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그걸 깨달았다.

 

변호사가 상인인지 아닌지를 놓고서는 대법원 판례까지 나왔을 정도로 논란이 있다. 그런데 내 보기에 변호사가 스스로 장사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직업의 공익성을 생각해서라면 가상하지만 자칫 그런 인식은 아상을 키운다. 장사치보다 낫다면 그것은 변호사의 사회적 책무를 고려해서일 뿐이고, 벌어먹고 산다는 점에서는 변호사가 더 나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실은 밥을 비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부처님도 밥을 빌었다. 일하기 싫어서였을까. 중국의 선사들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일렀지만, 부처님이 그런 이치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밥을 빌어먹는다는 것, 그 찜찜한 기분, 어쩔 수 없이 모욕적인 상황 속에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나 비구라는 이름의 수행자들에게 아상을 버리도록 매일 일깨운 것이었으리라. 이것이 바른 자세다. 나 잘나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다. 실인즉 프로페셔널은 얻어먹고 사는 것이다. 그가 사회의 상부 구조에 있다는 것이 그의 밥벌이가 고귀하다고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어느 대법관이 퇴임 기념 논문집을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답사를 했다. "그 후로 저는, 재판 기록 이면에 맥박 치는 서민들의 꿈과 절망을 법관의 시각으로 재단하여서는 안 된다, 그 절실한 꿈과 절망을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열정이 법조인의 기본이다라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누가 법정의 주인인가? 가끔 법정에서는 고약한 당사자들을 만난다. 이를테면 진상고객이다. 그런데 그 이악스럽고, 무식하고, 말 안통하고, 억지쓰고, 자기밖에 모르고, 얄밉고 때로 가증스러운 당사자들, 이들이 바로 법정의 주인이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본말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법관에게 영예로운 자리와 월급을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이 생긴 당사자의 사건을 처리해달라고 만든 것이 법원이다. 이 간단한 이치가 곳곳에서 망가지는 현장을 보고 있지만 참으로 슬프다.

 

모든 법이 꼭 필요해서 만들어놓은 것이라거나, 세상 사람 모두 철저히 법을 지켜야 한다거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그로 인해 일이 잘못될 것이라거나,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꼭 사회악이라고 생각할 일도 아니다. 법이란 것도 사람이 하는 약속의 문제이며, 그 약속을 어떻게 지켜야 하고 어떻게 지키게 해야 하는가는 그 사회, 즉 그 법 공동체가 당대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에서 말하는 실체적 진실은 매력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절차와 증거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찾아내야 할 어떤 진실이 저편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당사자의 절차적 권리를 무시하더라도 진실을 찾는 것이 올바른 사법과정이라고 믿게 만든다. 양심적이고 능력있는 법관에게서 이런 신념을 발견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그런 식의 정의실현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나중에 알고보니 그렇게 찾아낸 진실, 즉 절차를 무시하고 재구성된 사실이 진시리 아니라 허위였거나 착오였음이 발견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재구성된 사실이 진실이기는 해도 그 과정에서 절차가 무시됨으로 인하여 시민이 알고 있는 정상적 삶의 방식이 침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 큰 문제다.

 

일전에 법원은 '웰컴투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음란물을 배포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다가 미국의 범죄인 인도 청구를 받은 손정우에 대하여, 범죄인인도법에 따른 인도심사 청구 사건에서 기각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대해서도 극심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잘못된 것은 그 이전에 손정우가 받은 형이 너무 낮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인도심사 청구 사건을 맡은 법원은 앞선 형사사건의 양형을에 대한 비난을 두고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할 정도로 적정하고 실효적인 형사처벌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그동안 수사기관과 법원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에 관련하여 문제의식이 미약한 상태에서 형사사법제도를 운영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판관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에 관해서는 예로부터 논의가 적지 않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을 소개하자면 19세기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존 싱글턴 코플리가 한 말이 있다. "(법관직에 뽑을 사람으로) 내가 찾는 것은 신사다. 법률을 조금이라도 알면 더 좋고." 이것 말고도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몇 가지 자질은 용기, 정직, 근면이다.

 

좋은 판사를 만나는 방법은? "기도하라." 좋은 변호사를 만나는 방법은? "찾으라."

... 그래서 해준 조언은 이랬다. 변호사가 이 사건을 당연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면 둘 중 하나인데, 사해행위취소 소송이 실무에서 어떻게 취급되는지 잘 모르고 덤벼드는 것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방어할 가능성이 희박해서 맡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변호사를 만나면 그에게 사건을 의뢰하라는 것이었다.

 

당신이 찾아야할 변호사는 우선 당장 당신의 기분을 좋게 해줄 말을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당신의 피눈물이 묻은 권리와 이익을 무겁게 알고 지켜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로 자기 법을 벌게 되는데 감사하면서, 그 밥을 가져다준 당신을 마음으로부터, 진정 마음으로부터 은인으로 여기고, 은인에게 감사한 마음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의 이익을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변호사, 적어도 그 둘을 같은 무게로 잴 줄 아는 변호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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