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밤 by 유희열
생각이 많을 때면 주로 산책을 한다. 무언가를 골똘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특히 밤에 걷는 걸 좋아한다. 내가 좀 더 나다워질 수 있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을 수 있도 있는, 비밀스럽고도 반짝반짝한 시간. 한낮의 풍경이 선명하고 쨍한 사진 같다면, 밤의 거리는 아름다운 것만 남기고 아웃포커싱 된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몰랐던 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시야는 흐릿한데 감각은 한층 예민하게 깨어난다. 바람이, 나무와 꽃이, 공기의 질감이 거리마다 새롭게 말을 걸어온다.
밤의 거리는 참 묘하다. 청각과 후각을 예민하게 깨우는 대신 시각은 절반쯤 잠재우는 시간.
훤한 대낮에는 일상의 남루한 편린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밤이 되면 그런 것이 전부 어렴풋해진다.
예쁜 것만 보이는 안경을 우리에게 씌우는지 밤에는 모든 것이 예뻐보인다. 한밤의 당신도, 이곳도 말이다.
요양원에 계신 지 오래된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일 하고 싶으신 일이 뭐예요?" 어머니는 요 근처 인왕시장에 가서 과일을 사고 싶다고 하셨다.
재래시장에 가서 과일 한 알 사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자 가장 큰 행복일수도 있는 것이다.
북정마을 대로를 따라 걸으니 때마침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마을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이번 정류장은 '노인정', 다음 정류장은 '슈퍼앞', 그 다음 정류장은 '양씨가게앞'.
단순하고 순박한 정류장 이름들에 절로 웃음이 났다. 특히 '양씨가게'가 무슨 가게인지 궁금해서 마을버스 기사님에게 물어봤다. 옛날에 잡화를 팔았던 구멍가게란다. 지금은 없는 가게인데도 모두가 정류장 이름으로 추억하고 있다. 어떤 기억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이다.
창신동 꼭대기에서 내려오다가 유난히 좁고 가파른 계단을 발견했다. 까딱 잘못하면 고꾸라지기 십상일 계단 모퉁이에 '돌산마을 조망점'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걸려있다.
표지판 앞에 서서 마을을 바라보니 거대한 절벽 위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삶의 풍경이 펼쳐진다.
창신동 돌산은 일제강점기에 화강암 채석장이었다. 조선총독부, 경성역(옛 서울역), 경성부청(지금은 서울시청), 조선은행 본점(지금은 한국은행)을 짓는 데 이곳의 화강암이 쓰였다.
매일같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돌산은 40여미터의 절벽으로 바뀌었다. 어두운 절벽 위아래로 밝혀진 창들이 반딧불처럼 가물거린다.
아픈 역사가 남겨놓은 극적인 풍경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모진 시간 속에서 반딧불이처럼 삶의 빛을 가물거리며 억세게 버틴 그 흔적들을 그저 먹먹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감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런 시시껄렁한 시간과 얘기를 나눌 친구가 점점 없어진다는 거다. 별일 없이 만나 시시한 얘기 나누며 낄낄거리고 아무 소득 없이 헤어지는, 그런 사이 말이다. 이 밤, 많이 변한 이 거리를 걷고 있자니 시시한 얘기를 나눌 친구가 정말 그립다.
주택가를 계속 걷다보니 카페, 케이크 베이커리, 파스타 가게, 술집, 밥집 등 다세대 주택 1층마다 작고 개성 넘치는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인 골목이 나타났다. 홍대 앞 가게들은 무엇을 팔고 있는지 자기 아이덴티티를 정확하게 드러낸다면, 이곳 가게들은 가까이 들여다봐야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있다.
'우엔(원앙을 뜻하는 베트남어)'은 베트남 가정식을 파는 밥집이고, '서양미술사살롱'은 커피와 술과 스파게티를 파는 커피 바이고, '들개'는 마스터도 있는 위스키 바다. 들개 마스터가 칵테일을 제조하면서 손님들과 얘기하고 있다.
아마도 무엇을 팔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하고 싶어서 만든 가게들이기 때문이리라. 왠지 어떤 꿈들의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중인 것만 같다. 은은하게 빛나는 꿈들의 온기가 따사롭다. 부디 성공하십시오!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대로, 나쁜 시간은 나쁜 시간대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의 촌장과 노래 <풍경>을 아주 좋아한다. 이 노래는 가사가 단 네 줄이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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