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며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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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비교할 길이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버녿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pity)이라는 단어는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 누군가를 동정 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co-sentiment)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을 지칭한다. 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소련군 사진을 찍으며 그녀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만은 연속극처럼 계속되었던 그녀의 꿈이 중단되어 그녀는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탱크로 무장한 소련군이 그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축제가 끝난 지금,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밤이 두려워졌고 밤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음식 값을 치르고 레스토랑을 나와서 더욱더 감미로워지는 우울에 빠져 거리를 산책했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한느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어머니는 테레자에게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며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다. 아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테레자는 삶의 최고 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믿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아홉 구혼자가 그녀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던 시절에 어머니는 맨살이 드러날까 조바심을 내던 여자였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내가 보기에 테레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멀리 내팽개쳤던 어머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따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그래서 토마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외과 수술은 의사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근본 수준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맞닿는 한계까지 고양했다. 누군가 사람의 두개골을 강력하게 내리친다면, 그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숨쉬기를 영원히 멈출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숨쉬기를 멈출 것이다. 이 살인은 조금 나중에 신이 손수 해결할 일을 앞당겼을 따름이다. 신이 살인은 예측했을 테지만 아마도 외과 수술은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신은 자신이 발명해서 조심스레 피부로 감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은폐하고 봉합한 체제 내부에 인간이 감히 손을 집어넣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토마시는 처음으로 마취 상태에서 축 늘어진 환자의 피부에 메스를 대고 확고한 힘을 가해 그 피부를 찢고 다시 정확한 솜씨로 봉합하면서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신성모독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필경 이런 점 때문이었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비극을 어깨에 걸머졌던 그가(그는 신의 아들이자 추락한 천사였다) 왜 이제는 고상한 것(신과 천사들)이 아니라 똥 때문에 심판받아야만 했을까? 가장 고상한 비극과 갖아 일상적 사건이 이토록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한 것일까?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하다? 근접성이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고 말고. 북극이 남극에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한다면 지구는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현기증 나는 진공 속에 놓여 추락의 유혹에 빠질 것이다.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똥을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해 생명을 바친 독일인들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 그렇다, 이들은 멍청한 짓을 위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도 없고 보편적 결과도 낳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생각 중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테레자의 영혼 속에서 싹텄다.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테레자는 자기 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적어도 여러 형태 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꾀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시느이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남편이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 주길 기대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업서.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 테레자는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조합장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일 분 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 농담은 반복된다 해도 그 재미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전원시의 맥락에서는 유머조차도 반복의 달콤한 법칙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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