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by 채사장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파괴한다.
만약 네가 짐승들에게 말을 건다면
짐승들도 너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그러면 서로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별 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별 모양의 지식이 담겨진 책을 읽으면 될까요?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어요. 지식은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책을 펴야해요. 삼각형이 그려진 책,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진 세계,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책장의 감촉과 적당한 소음과 익숙한 냄새. 이 모든 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모습일 뿐이다. 나는 세계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그려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 모든 의식적 존재는 자신의 마음 안에 갇혀 산다. 이러한 결론은 엉뚱한 상상이 아니다. 서구의 관념론 철학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인들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세계가 자기 자신에 의해 재구성된 자아의 세계임을 지혜롭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관은 낯설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평균적인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현대인에게 이 문제가 한 번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세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놀랍도록 독특하고 유일한 자아라는 존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경제는 소비자와 시장의 관계를 말하고, 정치는 시민과 정부의 관계를 말하며, 사회는 대중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과학은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말할 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자아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는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헤어짐이 반드시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패도, 낭비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았을 때, 내 세계의 해안을 따라 한번 걸어보라. 그곳에는 그의 세계가 남겨놓은 시간과 이야기와 성숙과 이해가 조개껍질이 되어 모래사장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고 있을 테니.
샤갈의 '산책'
https://www.asiae.co.kr/article/2011033109004650303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다. 이제 그의 지평은 나의 지평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결국 나의 세계와 겹쳐진다.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기존의 세계에는 없던 신비하고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그의 향기, 그의 옷가지, 그의 가구들, 그의 취향, 그의 언어, 그의 습관들, 그의 세계관, 나는 그가 먹는 것을 먹고, 그가 하는 말을 따라 하며, 그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 필요한 거야."
여인은 알고 있었다. 남자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것은 그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말이니까. 필요 때문에 붙잡고 있는 것과 사랑하기에 함께 하는 것은 다르다.
소녀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무수히 많은 꿈을 꾸었고, 꿈 가운데 순수한 열망과 환희와 아쉬움과 미련을 경험했다. 그러헥 충분히 감정적 소모를 끝낸 후에 햇살에 반짝이는 침구 위에서 그녀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누워 베게에 남아있는 그의 냄새에 안도하며 지난밤의 꿈들을 기분좋게 상기했다. 그녀가 오두막에 소년병이 없음을 알게 된 건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통념과는 반대로 흔한 것은 이들이다. 한 가지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한 가지 목표에 모든 것을 거는 행위다. 이들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들이 강한 의지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라, 반대로 이들이 나약해서다. 현실에서의 경험이 부족하고 세계의 복잡함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이들은 나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언가 분명해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이것에 집중하겠다는 단순한 전략을 세운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한 가지 전략으로 대응하는 적처럼 우스워 보이는 것은 없다. 세상은 이들을 쉽게 쓰러뜨린다. 진짜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쓰러진 이유를 오해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재도전을 다짐하며 또 다시 이렇게 말한다. 예전의 나는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길가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걷는다는 것. 그것은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가기 위해 신중히 걷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세상이 나에게 골라보라며 펼쳐주는 것들. 진로, 직업, 사업, 종교, 신념, 목표, 미래. 세상은 한 번도 당신에게 단 한가지만을 골라 그것에만 매진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반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하나의 전문직을 가져라', '평생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종교를 가져라',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라', '언제나 노력하고 나태해지지 말라' 하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애햐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것밖에 없는 빈곤하고 겁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거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고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시간을 고스란히 지내야만 한다. 그것은 가르쳐준다고, 알려준다고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세상을 살아가며 얻게 된 소중한 경험과 이해는 오래 산 존재들과 함께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세상은 이 세상이 처음인 싱싱한 존재들이 장악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게 아니겠는가. 세상이 이렇게 치열하고 다채롭고 활력 넘치는 이유가. 그래서 세상은 여행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무엇이 비극인가? 우리는 지금도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눈뜬 신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해서, 그것을 아끼고 애지중지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은가? 도대체 뭐가 그리 문제란 말인가?
집착 때문이다. 나의 신체와 내가 가진 것에 마음이 쏠려 한시도 잊지 못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나의 몸과 나에게 연결된 것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유일한 것이라서 그것이 어찌 될까 봐 조마조마해 하고, 움켜쥐려 하고, 끝내 감싸 안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된다.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보다 버거운 이유, 내 삶이라는 게 남의 삶보다 더 고된 이유, 내가 손에 쥔 것이란 남이 가진 것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이유, 나의 삶은 이상하게 번잡하고 고통스러웠던 모든 이유는 그래서였던 것이다.
모든 자아는 살아가는 시간이 다를 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범위와 길이에서도 차이를 갖는다. 쉽게 말하면 미래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가까운 미래를 현재로 당겨와 살아가고, 다른 이는 아주 먼 미래를 현재로 당겨와 살아간다.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가까운 시일에 티벳에 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보편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만약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편의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티벳인들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보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생각했다. 그것이 진짜 이유인가. 왜냐하면 티벳에 가겠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오래된 의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처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말을 너무도 많이 반복해왔다.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 건,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으로부터 티벳 여행에 관한 책을 받았을 때였다. 그동안 그녀를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어왔던 것인가. 나는 미안해졌다.
만다라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미적인 색감과 모양과 승려들의 정성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만다라가 완성과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만다라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쌓여진 바로 그 순간, 승려의 모진 손이 둘레의 가장자리부터 중앙까지를 훑는다. 망설임 없는 그 손짓에 모래는 뒤섞이고 선명한 색상은 혼합되어 빛을 잃는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끝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죽음은 두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수동적으로 닥쳐오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이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하나의 사고이고 돌발이며 일탈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회피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다음으로 능동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언제 어떻게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음을 전체 과정의 마무리로, 수작업의 마감질로, 여행의 마지막 날로, 긴 문장의 마침표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이에게 죽음은 삶과 단절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길고 긴 인생을 마치고 결실을 수확하는 시간이 된다.
나이가 든다는 건 다행이다. 어린 날의 들뜸과 격정은 가라앉고, 섬세함은 무뎌지고, 무거움은 가벼워진다. 죄책감은 줄어가고, 헛된 희망은 사라지고, 안타까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나는 다만 고마웠다. 연인의 불안을 나누어 지고 젊고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해준 그녀에게 다만 고맙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에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무거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무엇이 그리 무겁다고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사람처럼 엄살을 부렸던 것일까. 운명이라거나 의무라거나 책임이라거나, 그런 것들은 생각처럼 무겁거나 슬픈 것이 아닌지도 모르는데.
당신 앞에 세상은 하나의 좁은 길이 아니라 들판처럼 열려있고,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목표점이 아니라 지금 딛고 서 있는 그 들판이다. 이제 여행자의 눈으로 그것들을 볼 시간이다.
이야기는 나와 세계를 관계 맺는 도구다.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어떤 안경이 되었든 반드시 집어 들어야 하고, 그 안경의 색깔이 만들어지는 명도와 채도 안에서만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A에게 이들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A에게 B, C, D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다만 A의 여집합, 즉 'A가 아닌 것들'로 규정된다.
이제 A에게는 역할과 의무가 발생한다. A가 진리이고 보편이며 전체이기 위해 A가 아닌 것들에 대한 제거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폭력이 가해진다. 폭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회유, 유인, 강제, 억압.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 세계는 아무도 독점적인 활동영역을 갖지 않는 세계다.
"내가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아침에 사냥 가고 오후에 고기 잡으러 가며, 저녁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나는 사냥꾼이나 어부, 목자나 평론가와 같은 전문인이 되지 않고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자본주의가 생각보다 괜찮은 체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자본주의가 나의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강요한다. 특정분야의 노동자라는 제한된 역할에 만족하라. 네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입을 다물고 소비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라. 나는 이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놀지 못하고 관계 맺지 못하고 생각할 줄 모르는, 다만 소비해야 하는 존재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과 글이 얼마나 오해의 소지가 많은지 대강이라도 느끼고 있어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사용한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노하우는 천차만별일 테지만, 이를 단순화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언어의 양을 늘리는 방향과 언어의 양을 줄이는 방향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A라는 의미를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하고자 할 때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하거나, 반대로 요약해서 핵심만을 전달한다. 이 두 방법은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선택해서 사용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다만 보통은 습관적으로 하나의 방법만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장황하게 부연설명을 반복해서 나의 영혼까지 탈진시키는 습관을 가진 사람과, 반대로 충분히 설명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 나중에 왜 말귀를 못알아듣느냐고 나에게 화를 내는 습관을 가진 사람.
<더덕 냄새>
비린 봄비 내음
코 속에 모았다가
지하철 화능로
더덕 파는 할머니 앞에
살살 흘리면
더덕 내음 한 줌
흙 내음 덤 해서
바꿔줍니다
책을 펴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글을 깨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체험이 필요하다. 독서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한글이 아니라 선체험이다. 우리는 책에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우리가 앞서 체험한 경험이 책을 통해 정리되고 이해될 뿐이다.
힘들이지 않고도 읽히는 책을 힘들이지 않고 읽어보자.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의 불안은 점차 가라앉고 머릿속의 안개는 조금씩 걷히게 될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당신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체험들의 엉킨 실타래가 풀리며 언어로 정리되기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미디어는 항상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내가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초조해졌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다만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해야 하는 일들을 겨우 수습해가는 작고 평범한 사람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안타까운 분노 속에서 그 시작을 떠올려보려고 애썼고 기억을 더듬어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훌륭한 사람도, 가치있는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웃을 줄 알고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것이 개체의 소멸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관계의 끊어짐 때문이리라. 인생이라는 시간 동안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짜낸 관계의 직물은 죽음과 동시에 올올이 풀리고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타자와 맺었던 이어짐도, 세계와 맺었던 이엉짐도, 그들 사이를 오고갔던 말과 글도, 침묵과 허망함 속으로 가라앉고, 남은 자들의 가슴에는 뜯겨나간 상흔만이 깊게 남는다.
날이 저무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을지 모른다. 노을지 지는 것도, 움켜쥐엇던 강물이 손가락 사이를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도, 정성과 집착으로 쌓아올린 모래성이 바람에 야위어가는 것도,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둘 잃어가는 것도 생각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과정일지 모른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이해하게 될, 그 어떤 약속에 대해서 나는 기대해보기로 했다.
팔라우의 해파리 호수. 나는 아직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호수와 황금색 해파리들의 물결을 보고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진정으로 보고자 하는 그들의 내면세계는 거기 도착한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세계를 경험할 기회는 이번 삶을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낸 이후에야 비로소 선물처럼 주어질는지, 알 수 없다.
질문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보통 답변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수많은 질문과 답변 중에는 답변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無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둥근 삼각형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언어로는 표현 가능하고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질문에 제시된 개념이 이미 질문 안에서 한계 지어지거나 모순되기 때문이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소설이자 영화로 제작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우리는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질문하거나, 질문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질문한다. 나는 특히 인류가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중요한 질문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의심이 오래될수록 의심이 실제처럼 느껴지듯, 질문이 오래될수록 질문은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답변의 범위를 강력히 제한하는데, 그것은 술어부인 '누구인가' 때문이다. '누구'는 인칭 대명사로 막연히 사람을 지시한다. 이것이 문제다. 이 질문은 모든 답변의 가능성에서 나의 의미를 사람에 한정한다.
물론 제한된 상황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찾는 해답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질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대답이 자아의 본질에 대한 것이라면 이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답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위의 사실을 두 가지 시점에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외부의 타자의 시점으로 이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당신은 잠깐의 발현 후 만년 동안 소멸하고 다시 잠깐의 발현 후 소멸하고를 반복한다. 여기에는 죽음이 있고, 단절이 있으며, 긴 침묵이 있다. 두 번째는 실제로 경험하는 나의 시점으로 이를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발현된 후에 삶을 경험하고 죽어가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죽음에 수렴한 직후 곧 바로 다시 눈뜨게 된다. 당신은 곧바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눈 뜨고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죽음은 문이 되고 통로가 된다.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의식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의 의식 안에서 시간과 공간은 매끄럽게 이어진다. 물론 어떤 기억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일 것이며,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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