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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21 #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by 한유석
Who am I ?!/Book2020. 4. 2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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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by 한유석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지금, 하루의 끝에 와인을 마신다. 여름에는 소비뇽블랑, 혼자라도 행복할 때는 피노누아, 스트레스 가득할 때는 시라나 카베르네소비뇽, 좋은 치즈가 생긴 날에는 샤르도네를 마신다. 멋지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생활처럼 마신다.
하루의 끝, 한번에 와인 한 병을 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 세 번에 나누어 마시는데 좋아지든 나빠지든 마실 때마다 맛의 변화가 좋다. 보관의 문제도 있겠지만 같은 와인이 공기와 만나 다른 표정을 짓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사람이지만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 각각 다른 표정을 짓는다.


서른을 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지겨워지게 된다. 취미생활, 또는 일상의 일탈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약발이 안 먹히게 되는 순간이 종종 온다.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무거워, 무거워"를 온종일 되뇌게 되는 날이 생긴ㄷ.
그럴 때는 스스로를 가볍게 할 술로 임시처방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 좀 길게 떠나자. 길게 떠난 자는 많은 것을 잊고 가벼워져 올 것이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비밀 몇 가지를 챙겨올 것이다. 일상이 지겨울 때, 몰래 펴볼 수 있는 마음의 기억을 많이 챙겨올 것이다.
술과 여행은 지평선을 닮아가는 일상에 지지 않는 힘이 되었고, 지치지 않고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비밀이자 비법이다.


어느 식당에서 셰프가 음식을 만들며 와인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음식은 더 맛있을 거라고 턱없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셰프는 행복했을 것이고, 그 마음이 음식에 담겼을 것이다. 국숫집에서 몸은 고단해도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마음이 손님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의 국숫집이 늦어지는 것은 내가 아직은 행복을 말하기에, 행복을 전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국숫집의 문은 열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중에서)


이 세상에 와서 한 번쯤 해야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한다. 결혼의 시작을 위해서는 여자는 설레야 한다. 남녀가 만나면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원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여자의 마음 한켠을 차지하는 것이다.
...
순간이 아닌 내내 설레게 하는 것은 같은 궤도를 도는 사람이다. 자라난 환경이나 일의 같음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희로애락의 같음, 지구와 달처럼 궤도를 공유하는 연결이다.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신경림, 낙타 중에서)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 사이에도 숨을 고를 필요가 있기에. 더 오래 만나기 위해. 더 소중해지기 위해.
사람 때문에 헉헉 거릴 때, 어딘가에서 보고 메모해두었던 글이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것은 타이밍의 영역이라면, 사람과 사람이 이어가는 것은 스페이싱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타이밍은 어쩔 수 없지만, 스페이싱은 하기 나름인데 참으로 어려운 것이 그 간격, 그 거리의 조절이다.


더 소중해지기 위해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할 때, 더 오래 만나기 위해 멈추어야 할 때 쓰는 단기 처방전은 나를 고단하게 하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든, 평소 즐기는 운동을 하러 연습장을 찾든, 읽기 시작하면 끝을 알아야 하는 추리소설을 밤새워 읽든, 몸을 나를 지치게 한다. 그리고 수분이 빠진 몸에 에일맥주가 아니라 라거맥주를 부어준다. 깊고 풍부해서 책처럼 머리를 채우는 에일맥주가 아니라 청량하고 깔끔해서 운동처럼 몸을 비우게 하는 라거맥주를 마셔야 한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드는 것이다. 그 시간만큼 거리를 두고, 숨을 고르는 것이다.
극약 처방전은 여행이다. 물리적으로 나를 멀리 보내는 것이다. 여행을 가면 떠나온 곳의 두고 온 것들이 근경이 아니라 원경이 된다. ...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된다는 순한 마음이 된다.

술은 음식이므로 술 역시 그 쓰임새와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막걸리를 풀코스로 꾸리라면 금정산성 막걸리-배다리 막걸리-덕산 막걸리 순이다.


과부였지만 성공의 아이콘인 마담 클리코가 만든 와인이기에 '뵈브 클리코'는 성공한 여자의 와인으로 언급되고, 일의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에 함께 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사랑과 일이 공존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 아쉬움, 속상함을 강렬함과 신선함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균형미의 샴페인을 만드는 데 쏟았던 것이다. 그래서 뵈브 클리코는 직장에서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라는 끈을 놓지 않는 동료이기도 하고, 후배이기도 한 직장맘들에게 따라주고 싶다. 뵈브 클리코의 버블이 피어오르는 그 시간만이라도 쉬어가라고, 즐기라고, 행복하라고 말이다.


음식이란 식재료에 시간과 시즈닝과 데커레이션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신선한 재료를 이길 수 있는 요리법은 없겠지만, 음식은 만드는 이의 레시피를 악보 삼아 연주한다. 자주 하는 요리에 계량스푼 따위는 필요 없다. 눈대중과 한두 번의 간보기로 충분하다. 하지만 새로 시도하는 요리는 가급적 레시피의 재료와 순서와 양념의 양을 따라주는 것이 좋다. 


여행을 가면, 이른 아침 혼자 일어나 바다이든, 성곽이든, 숲길이든, 도심이든 산책을 한다.
...
새벽 산책은 여행을 더 길게 늘리고자 하는, 잊혀지고 바래질 수 밖에 없는 여행의 기억을 조금 더 붙잡고자 하는 나의 음미이다.
...
밤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두렵지만, 누구를 해칠 사람은 새벽길을 달리거나 걷지 않는다.


봄꽃은 하루 20km를 북상하고, 가을 단풍은 하루 25km로 남행한다고 한다. 자연도 사람처럼 만남보다 헤어짐이 속도가 빨라 단풍 소식 앞에서 때를 놓칠까 서두르게 된다.
...
나무에 단풍이 드는 것은 사실 떠나는 것이 아니다. 끝내는 것이 아니다. 다음 한 해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비우는 겨울 채비이다. 가지의 수액을 뿌리로 내리면서 생기는 현상이 단풍이고, 비우는 길에서 나무는 노랑이 되고, 주황이 되고, 빨강이 되어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비우는 것이 저리 고우니 눈을 떼기가 어렵다.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그냥의 시간으로는 되지 않는다.


갓 만들어진 음식은 그 음식이 원래 갖고 있는 것이 기분좋게 부풀려져 감성의 맛을 갖게 된다. 갓 지은 밥은 모락거리는 연기와 더불어 더 많은 수분과 찰기를 품고 있고, 갓 무친 나물에는 나물의 탱탱함과 침투하고자 하는 양념의 의지가 부딪히는 긴장감이 있다. 갓 구운 빵 속에는 볼을 최대한으로 부풀린 효모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담겨 있다. 갓 내린 커피는 뜨거운 소나기 뒤 무지개처럼 원두의 속내와 향이 쏟아지다 펼쳐진다.
갓 만들어진 것이 더 맛있는 것은 어쩌면 물성을 넘어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의 포개짐 때문일 것이다. 같은 시간에 머물고 있다는, 소중히 생각한다는 그 온기로 맛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마음이 된다.


꽃처럼 한 해 한 해를 살자! 문정희 시인은 꽃은 핏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기에 늙은 꽃은 없다고, 꽃의 생애는 순간이고, 순간에 전력을 다한다고 한다. 녹차의 깊이는 우전에만 있지 않다. 잎을 따는 시기가 다른 세작, 중작, 대작에는 또다른 깊이가 있다. 나이드는 것,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름다운 외모에서 멀어지는 것보다 온전한 열정에서 멀어지는 것이 참혹한 일이다. 한 해 한 해가 새로운 백지이고, 마음을 다한다면 한 해 한 해가 전성기다.


연애가 아닌 사랑을 하자! 상대방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연애이고, 주변이 전부 보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


이제는 그런 광고일의 끄트머리로 가고 있다. 부족함으로 시작해서, 아쉬움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광고 인생이 끝나기 전에 한 가지 바람만 남기라면 앞에 적어놓은 것 같은 술 광고를 만들고 싶다.


서운하다, 라고 써놓고 한참을 노려봅니다. 이내 눈빛은 약해지고 가슴도 주저앉습니다. 서운하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지요. 뒷마음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사그라드는 아쉬움과 달리 억울함과 억측이 꼬리를 무는 마음. 사랑과 미움이 뒤범벅되어 분별을 잃어버린 마음. 끝내 서러워 울음으로 터지는 마음이지요. 어쩌자고 이런 마음이 있는지요.


서운함에는 늘 물기가 함께이죠. 그것도 스며들고, 고이는 물기이죠. 그래서 서운은 얼룩이 남기 마련이죠. 서운했던 일과 사람은 잘 지워지지 않는 법이죠. 화에는 이해와 용서라는 어른의 알약이 필요하죠. 그러나 서운함이 가시려면 조심스럽게 순한 물약을 써야해요. 서운함은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되기에 아픈 것이 당연함을 그냥 받아들여야 해요. 천천히 나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해요. 아이는 약이 아니라 울어서 낫듯이 그렇게 나를 위해, 서운함을 준 상대를 위해, 많이 울어서 나아야 해요. 눈물로 빨래를 하고 나면 언젠가 마르는 법이죠. 흘린 눈물이 많다면 얼룩도 사라지겠죠.


스스로를 넘어서는 술이 있다. 와인, 맥주, 청주는 뜨거운 불과 만나, 버리고 버티며 브랜디, 위스키, 증류식 소주가 된다. 와인, 맥주, 청주가 살아있는 술이라면 브랜디, 위스키, 소주는 살아가는 술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같으면서도 참으로 다르다. 전자는 삶의 아름다움과 닿아있고 후자는 삶의 슬픔과 닿아있어 전자는 섞이려 마시고, 후자는 혼자이고자 마신다.


누군가 자신은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했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름다운 그늘이건, 어두운 그늘이건, 편안한 그늘이건, 서늘한 그늘이건, 슬픈 그늘이건 그늘은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햇빛을 피하지 않고 오래 서 있거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침잠해간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늘은 만들어진다. 그늘이 있어야 머무를 수 있다. 그늘이 있어야 추억할 수 있다.


누군가는 상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치부할 수 없는 자경씨의 미소, 말투, 배려가 있다. 고객의 취향을 알려 하고, 계속 체크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낮은 가격으로 사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경씨는 와인숍이 와인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마시는 기쁨을 고객과 함께 고르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같다. 나의 업도 크게 다르지 않기에 자경씨처럼 클라이언트에 그러했는지 묻게 된다. 반성하게 된다.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는 친구에게 어느 광고처럼 냉정하게 엎질러진 물처럼 다시 다시 담을 수 없다고 하지는 마. 사람, 사랑, 삶은 알 수 없으니까.


모르는 술을 만나면 행복해. 마시기 전까지 그 맛을 알 수 없으니까. 마시고 난 후의 나를 알 수 없으니까.


여름이다. 신맛, 쓴맛이 있어 입안에서 더 상쾌하게 기억되는 하귤청을 담근다. 하귤을 물에 담가두었다 솔로 깨끗이 문지르고, 데치고, 체반에서 물기가 말라가기를 기다린다. 물기가 사라지면 씨를 일일이 발라내며 자르고, 설탕이나 당에 켜켜이 재운다. 일주일 후면 탄산수를 넣어 상큼한 하귤에이드로 즐길 수도 있고, 여러 생각이 많은 밤, 데운 우유를 넣어 향긋하고 부드러운 하귤청라테로 잠을 청할 수도 있다.


국문학의 거장은 쓰려면 그 10배를 읽어야 한다고, 그것이 글쓰기의 윤리라고 한다. 그렇듯 사랑받으려면 그 10배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윤리이다.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는 그 10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윤리이다.
남이 해주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실 때는 모르지만, 직접 음식을 만들고 술을 담가보면 어마어마한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준비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음식과 술은 깊어진다. 음식은 살이 되고, 술은 피가 되기에 더욱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바다의 돌이 반짝이는 것은 돌이 스스로 반짝여서가 아니다. 바다의 물 때문이고, 햇빛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반짝이게 하는 곁이다. 곁이 있다는 것, 참 따스하다. 힘이 된다.


일년만에 옷이 해졌다. 여행지에서 산 스키니진인데 흔하지 않은 팥죽색에, 편해도 너무 편해 사계절 내내 사무실에서도, 여행에서도, 높지 않은 산에 오를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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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게 된다. 해지면 헤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소중한 것과 오래가기 위해서는 쉬어감이, 여백이 필요함을 말이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주 입게 되면 해지고, 좋아해서 자주 먹게 되면 물리고, 좋아해서 자주 만나게 되면 그리움이 사라진다.


나는 나다. 고독한 우주에서 유일한 별빛이다. 나로서 살라. 내가 태초이자 시작이고 빅뱅이다. 내가 인생을 시작하고 살다가 패배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누가 가르친 대로 살지 마라. 내 실존의 지대한 존엄성에 대해 이 세계의 어떤 먼지도 모독할 수 없다. - 고은, 강연 중에서


술은 좋은 날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시면 좋아지는 거라 했지. 씨클로도 행복한 날에 타는 것이 아니라, 씨클로를 타면 행복해져. 
...
술을 좋아한 진짜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뜻대로 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아 속상하고, 의기소침해지고, 연연해하는 것이 사는 일이다. 그래도 마음에 품고 기다리는 것이 있고, 기적처럼 어느 날 눈앞에 당도하는 일이 있어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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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