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임경선, 요조)
(임경선) 사람들은 보통 '나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구하는가'의 답을 찾기 위해 머리 싸매고 자아 찾기를 하고, 이것저것 건드려보곤 해. 막상 해보니 '어라? 이게 아니었나?' 싶으면 또다른 것을 찾아보고...
...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반대방법이 낫다고 봐. '하고 싶은 걸 찾기'보다 '하기 실흔 걸 하지 않기'부터 시작하는 거지. 왜냐, '좋음'보다 '싫음'의 감정이 더 직감적이고 본능적이고 정직해서야. '하기 싫은 것 /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 이런 것들을 하나둘 멀리 하다보면 내가 뭘 원하는지가 절로 선명해져. 글쓰기로 치면 일단 손 가는대로 편하게 막 써놓은 후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직감적으로 가지치기하는 거지. 그러면 글이 명료해지면서 내가 애초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분명해지지. 더 나아가, 직감적으로 '아, 싫다'라고 느끼면 나를 그들로부터 격리해주는 것이 가장 본질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고 생각해.
(요조) 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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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솔직함은 못됐다는 거 언니도 아시죠. 타인이 민망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타인이 상처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누군가는 솔직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요. 반면 누군가는 반대로 타인의 상처를 희석시켜주려고 아무도 묻지 않은 자신의 실패를 일부러 드러내면서 솔직을 사용하죠.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이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끝끝내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요.
(임경선) 나에게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일'은 그저... 원래 멋졌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게 바로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일인데.
(요조) 아무튼 사랑으로 엮인 관계 안에 계란처럼 비밀이 있다면 다들 조심조심했으면 좋겠어요. 뭐가 들었는지 일일이 바닥에 깨뜨리면서 이게 사랑이야! 라고 외치는 바보짓은 제발 좀 멈추고요.
(요조) 꽃은 인간의 애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애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봐도 봐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멀리서 보면 화사하고 아름답고 청초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정말 야하고, 음흉하고.
(임경선) 혹시 영화 <컨택트>를 본 적 있니? 원작소설의 제목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지. 한 과학자가 자신의 미래에 닥칠 어떤 불행에 대해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는데, 그 불행은 박완서 작가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아주 미량의 감미로움조차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슬픈 일이야.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나중에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정해진 수순대로 담담하게 걸어가면서, 그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행복을 한껏 끌어안아. 마치 훗날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모른다는 듯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는 고통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어떤 고요함을 보여주었지. 그래서 보는 사람에겐 오히려 더 예리한 통증과 울렁거림이 여운으로 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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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차피'와 '다 똑같아'라는 말 그 자체에도 반대하는 입장잉. 그것은 애초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차단하고, '안 좋아짐'을 기정사실로 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단수낳게 하향평준화시키는 단어라고 생각해.
(임경선) 나는 '비겁한' 사람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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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검함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어. 나는 비겁한 사람이란 우선 자기 자신과의 문제가 아직 해결이 되지 않은 사람 같아.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해소하거나 해결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과거의 상처가 있어도 그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드하거나 아물게 하려고 애쓰는 대신, 남을 탓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만 하는 느낌이야. 일단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정직'하지도 못해. 자기 자신한테 정직하지 못하니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뒤틀리고 꼬인 모습을 보여.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 가령 자기나 주위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리트머스지 테스트처럼 그 사람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
(임경선) '대외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서로에게 '언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특히나 같이 살고 있다면 참지 말고, 자신이 솔직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갈등을 겪는 게 힘겹고 두려우니까 그냥 적당히 맞추면서 넘기거나, 핵심을 피하거나, 익숙함으로 산다고 체념하거나, 남편하게 다 맞춰주는 '너그러운 엄마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격한 싸움이나 피눈물과 절망감이 동반된다고 해도, 이 사람에게만은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늘 다짐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임경선) 상대가 원하는대로 하기 위해 내가 무리해서는 안돼.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진리지. 내가 나를 억누르고 상대가 원하는 바대로 하게 두면,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요구가 부당해 보인다면, 내 안에 분노가 쌓이게 돼. 의무감에서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그 상대를 좋아할 수가 없어.
(요조) 여태 해왔던 자신의 일을 돌연 그만두고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만 용기가 아니라, 여태 해오던 일을 앞으로도, 가능한 오래, 변함없이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재조정하는 것도 정말 큰 결단의 태도인 것 같아요. 말하자면 자신의 현실적인 한계를 직시하는 용기인 것이죠.
(임경선) 오랜 상처를 그냥 나의 일부로서 가지고 살자고 결기있게, 밝게, 체념할 줄 알아야 해. 놓아줄 건 놓아주고, 보내줄 건 보내주고, 훌훌 털 거 다 털어버려야 하는 시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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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이 되어도 고민하는 것은 좋은 거야.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고민을 하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찾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요조) 하나의 통일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좇아가며 우리는 타인과 약속을 하고, 비행기나 영화 예매를 하고, 잘 시간을 정하고, 일어날 시간을 정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자기 인생에서는 제각각의 시계를 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장강명 작가님이나 박산호 번역가님처럼 자신에게 남아 있는 전 생애를 추정해서 계산하는 시계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니나 저처럼 1년 정도의 시간만 계산이 가능한 시계를 차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임경선)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 당신은 그게 진짜 질문이 아니라고 지적할지도-정확한 지적이다-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질문이 성립하겠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질문이 되지도 않는다. 얼마나 사랑할지, 제어가 가능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대신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으나, 사랑만은 아니다.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요조) 제가 인류에 느끼고 있는 가장 서글픈 귀여움 중에 하나는 대체로 인간은 울다가도, 절망가다가도 배고픔을 느낀다는 거예요. 얼른 빵을 굽고 달콤한 잼을 준비하고 차가운 두유를 아끼는 잔에 따라야지.
(요조) 똑같이 비슷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매 순간 공들여 임하는 사람의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윤이 나는가봐요.
(임경선) 노력하는 사람이 왜 멋진 줄 아니? 다른 멋진 사람을 보고 '멋지다'라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인정할 수 있어서 그래. 너의 노력하는 모습과 노력하지만 그거을 겉으로 굳이 티내지 않는 모습이 꽤 멋있다고 생각해.
(요조) 나 정도면 제법 삶을 유연하게 살고 있다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면 지금의 나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내심 생각했거든요. 사실 누구나 저처럼 생각할 거예요. 세상은 자고로 이런거다, 라는 지론이 다들 자기가 살아온 삶을 통해 두툼해진 채로 우리는 어른이 되잖아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는 타인들을 그다지 설득하고자 하지도 않죠. 보통은 근야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뿐이에요. 저 사람은 나랑 생각하는 게 다르네, 하고 거기서 그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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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날 때부터 행복이라는 대전제 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기억하고 싶다. 더이상 자잘하게 행복을 구체화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면 나는 불행까지도 하나하나 느껴야 할 텐데 그게 싫다. 나는 아픈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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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행복이라는 걸 끼니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아무리 꽉꽉 배부르게 먹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또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처럼 최대한 맛있는 거 먹고 배부름을 잠깐 만끽하고 다시 배가 고프면 또 맛있는 걸 찾아헤매는 식으로 행복을 다루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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