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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15 아무튼, 식물 by 임이랑
Who am I ?!/Book2019. 10. 15.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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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식물 by 임이랑

 

나는 지금 내 방에 앉아 있다

오늘은 빗소리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평소의 나는 열 시에서 열두 시 사이에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오늘은 무려 아홉시에 일어났다.

올해초에 매트리스를 몸에 꼭 맞는 제품으로 바꾸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 누운 채 꾸물거리는 시간이 훨씬 늘었다.

이것은 행복한 변화이기도 하고 한심한 변화이기도 하다.

조금 한심해도 행복하다면 괜찮다.

 

처음 이 집을 구경하러 왔을 때는 작은 테라스에 홀랑 넘어가서

이 이상한 각도들이 내 삶을 얼마나 귀찮게 만들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저 테라스에서라면 담배를 마음껏 태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하기에도 좋아 보였다.

햇살 아래서 낮잠을 자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야외활동을 즐겨하지 않는 성향인 사람으로서

집 안에서 바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게 좋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외부가 존재하다니!

이 집에서 살게 된다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밖에 나갈 수가 있다!'

 

보통의 아침에는 식물들과 노는 편이다.

아침이면 집 안팎의 식물에 물을 주거나 시든 이파리들을 정리한다.

여러 가지 흙을 배합해서 분가링를 하고 각 흙에 따라 달라지는 식물의 성장세를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지난밤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아침이 오면 늘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이 소소한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기를 남몰래 빌기도 한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시기의 나에게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늘 아니라고, 더 힘들어지면 가겠다고 거절했다.

병원에 가는 것이 싫거나 정신건강의학과 약물 치료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가 괴로웠고,

내 상황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싫어서 그랬을 뿐이다.

괴로운 정신세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싫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힘껏 도망쳐야만 했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나면 밤이 오니까,

밤이 오고 나면 또 잠으로 도망치곤 했다.

이상한 굴레를 거듭 반복한 시절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 시기에 식물에 깊이 매료되었다.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나를 소 개할 필요도 없었고, 스스로를 치장하거나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아도 괜찮았다.

식물들은 내가 애정을 쏟은 만큼 정직하게 자라났다.

그 건강한 방식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뜻밖의 변화들

게절은 단순한 것이었다.

나는 봄이 싫었다. 이유 없는 짜증이 밀려오면 봄이었다.

더워서 자꾸 차가운 음식을 찾게 되고 집 밖으로 나가기 싫으면 여름이었고,

찬 바람에 정신없이 휩쓸리며 불안과 괴로움이 몰아쳐오면 가을이었다.

겨울엔 이불 속에서 발바닥을 비비며 누워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계절의 의미가 달라졌다.

싹이 터져 오르는 봄의 마법에 취하고,

여름의 더위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가을의 냄새와 겨울의 질감이 무엇이고 어찌 그리 신비로운지 온전히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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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