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Book2021. 7. 16.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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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by EBS (너나위 추천도서)

 

사실 은행이 하는 비즈니스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대개의 비즈니스란 이미 만들어진 상품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는 '존재하는 것'들이다. 만들어진 물건, 언제든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은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판다. 가상의 것을 부풀리고 주고받음으로써 현실의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결국 은행은 자기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돈을 창조하고, 이자를 받으며 존속해가는 회사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가 빚 권하는 사회가 된 이유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출 문자가 날아오고, 여기저기 은행에서 대출 안내문을 보내는 이유이다. 고객이 대출을 해가야 은행은 새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후에 디플레이션이 오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껏 누렸던 호황이라는 것이 진정한 돈이 아닌 빚으로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계속해서 늘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해서 만들어낸 돈이 아니다. 돈이 돈을 낳고, 그 돈이 또다시 돈을 낳으면서 자본주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의 정해진 길을 걷고, 그것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다시 디플레이션이라는 절망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숙명'이다.

 

달러를 발행하는 곳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eal Reserve Bank), 흔히 줄여서 FRB라고 부르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은행은 정부기관이다. 그러면 FRB의 Federal은 말그대로 '연방 정부의'라는 뜻일까? 미국의 전화번호부를 찾아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먼저 연방 란을 찾아보면 FRB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민간기업 란을 찾아보면 FRB가 보인다. FRB의 건물 간판에는 Federal Reserve Bank로 되어있지만 공식 명칭은 the Federal Reserve System이다.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약 4천800개의 일반 은행이 회원으로 가입된 곳으로, 용어만 Federal이라고 사용했을 뿐 정부기관이 아닌 순수한 민간은행에 불과하다.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가 돈을 발행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정부도 돈을 빌려야 한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상원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지만, 사실은 민간은행의 연합이다. 은행을 위해서 일한다. 연방준비은행의 12개 지점에서 달러 지폐를 발행하는데, 달러 지폐를 보면 어떤 지점에서 발행했는지 알 수 있다. 은행이 현금이 필요해 연방준비제도에 현금을 요청하면 정부기관인 연방인쇄국(조폐국)에 찾아간다. 그냥 인쇄하는 곳이다.

 

금융기관이 활동하고 있는 자본시장에는 딱 하나의 논리가 제일 중요하다. 그것은 '돈의 논리'이다. 금융기관을 탐욕을 부릴 수 밖에 없는 곳이고 탐욕적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금융이라는게 어렵다는 것이다. 금융공학이라는 생소함 때문에 마치 금융공학자들 또는 금융전문가들이 얘기하면 마치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합법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국부론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뉴턴의 '원리'만큼이나 정말 중요한 책이다. 근대 경제의 기본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노동 분업과 국민총생산, 무역과 개방의 중요성, 무역장벽의 문제점들은 지난 수십년 간 경제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철 지난 고전이 아니다. 최초로 자유시장 체제를 설명한 기본 틀이자, 지금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명저인 것이다. 그런데 '국부론'이 출간된후 정부의 개입이나 규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의 이론을 시도 때도 없이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들먹이며 정부의 개입이나 규제 따위는 없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던 것이다. 아담스미스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아담스미스를 '돈 많은 부자들의 편'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그가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거대정부를 반대하고,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 땜누에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스미스를 '부자들의 편'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은 오해를 사는 부분이 바로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부분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부자들의 무한정한 이익 추구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이기심은 사회적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허용된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아담스미스는 결코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인간행동 규범의 틀'안으로 한정했다. 이는 결국 부자나 가난한 자나 평등하게 그 틀 안에서 부를 추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이전에 썼던 '도덕감정론'의 주장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많은 연민을 느끼던 스미스는 그들을 돕는 최선의 길은 자유시장경제라고 생각했고, 이를 강력하게 옹호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기 때문에 그 이기적인 행동도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본주의'란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이상은 '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 체제'로 요약 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주요 목적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은 왜 항상 가난할까?' 그리고 '왜 놀고먹는 자본가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될까?'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는 그 해답을 이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냄으로써 찾아낼 수 있었다.

자본론 1권은 어떻게 자본이 이윤을 남기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일수를 늘리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케인스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첫째, 좋은 수준의 고용률, 둘째, 더 평등한 사회, 정부는 완전고용에 대한 책임이 있다. 최상의 고용률과 생산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주요이론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불완전한 지식에 기초한다. 가장 똑똑한 인간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한 부분일 뿐 상대적으로 무지하다. 이 기본적인 통찰에서 하이에크의 주요이론이 나온다. 그의 주요이론은 '계획자의 부족한 지식 때문에 중앙경제 계획은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경쟁적인 과정에서 많은 의사결정자가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환경에서 의사결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노력하고 배우고 진화하는 과정을 통해 어떤 결정이 옳고 어떤 결정이 실패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모든 의사결정을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실수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게 하이에크의 주요사상이다. 하이에크의 사상은 소비에트연방 같은 대규모 중앙계획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경제 성장이나 일반적인 번영을 이뤄내지 못했다.

 

행복은 어느 사회에서나 같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기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이란 즐기기에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행복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가치에 따라 살 수 있다. 돈과는 상관없다.

자본주의가 위대한 이유는 개인에 맞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빈곤은 자유재지만 매우 비싸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음녀 돈이 많이 든다. 세금을 내지 않고 세금을 받는다. 복지의 목적은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지나서 생산적이 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자기가 있어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자신과 자녀들은 리스크가 더 큰 직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 레이번 삭스, 스티븐 쇼어

 

인류역사상 등장했던 그 어떤 체제도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껏 막대한 인류의 부를 만들어냈던 근본적인 동력이자 시스템이 되어왔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자본가, 은행, 정부를 위한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의 혜택은 이제 99%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그 강력한 성장엔진을 우리 모두를 위해 나누어 써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살마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소득의 불균형을 해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모습이 가장 영속가능한 자본주의는 아닐까, 하는 제언을 감히 해본다.

 

인도 야무나 공원의 마하트마 간디의 추모공원에는 간디가 말한 '7가지 악덕'이 있다.

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

국가를 망하게 하는 첫번째는 '철학 없는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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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
Who am I ?!/Book2020. 2. 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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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 by 조지 오웰 / 르포르타주

이런 점을 사람들은 늘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탄광을 생각할 때 깊이와 더위를, 암흑을, 그리고 채벽을 파내는 시커메진 사람을 생각하되, 기어서 몇 키로미터를 왔다갔다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중산층 중에는 '하층민'은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기차를 타고 가다 어쩌다 캐러밴 거주지를 보면 다짜고짜 저런 데 사는 사람들은 원해서 저러는 거라고 여기는 이들이 아직 있는 게 분명하다. 요즘 나는 그런 유의 사람들과는 절대 언쟁을 하지 않는다. 한편 캐러밴 거주자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반 주택 못지 않은 집세를 내고 있다. ... 그렇다면 확실히 누군가는 캐러밴 때문에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 아닌가! 아무튼 그들이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주택 부족 때문이지 빈곤이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다.

배에 기름 찬 부르주아들은 슬럼 거주민들이 스스로 좋아서 불결함과 혼잡함을 원하다고 믿고 싶어하는데, 그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번듯한 집을 줘보라.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번듯하게 가꾸는 법을 금세 배울 것이다. 나아가 근사한 집을 주면, 그들은 그 수준에 맞춰 보다 자존적이고 청결한 생활을 해나갈 것이고, 아이들은 더 나은 삶을 시작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실업자 수가 200만이라는 수치 인용을 보면, 200만 명이 실직했으며 그 나머지 인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쉽다. 나만 해도 최근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다고 인정해야겠다. 
...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과소 추정이었다. 우선 실업 통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실업수당을 타는 이들 뿐이며, 그들은 대개 한 가계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실업 가장의 피부양인들은 그들 역시 별도의 수당을 타지 않는 한 수치에 반영되지 않는다.

'자산조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 제도 때문에 노인들이, 그 중에도 때로는 병석에 누워있던 노인들이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실업이 남자든 여자든 모두를, 특히 여자보다는 남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무기력감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다 해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러다 처음으로 가까운 주거지에서 실업자들을 보았을 때, 몹시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실직한 것을 '수치스러워' 한다는 사실이었다. ... 그 당시에는 누구도 실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실업이 계속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모두 같은 처지가 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말하자면 여생을 실업수당에 의존하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들이 잔뜩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감탄스럽고 심지어 희망적이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파탄을 겪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노동 계급은 중산층처럼 빈곤의 부담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 즉, 그들은 일자리를 잃는다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들은 어떤 면에서는 생각만큼 사정이 나쁜 게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정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생각 이상으로 그렇다. 수많은 가족이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 제도가 깨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긴축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운명에 발악하기보다는 생활수준을 낮춤으로써 상황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겉으로나마 보이고 있는 적응은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혁명적으로 변한 것도 자존심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노여움을 참고, '피시 앤드 칩스' 수준에서 그럭저럭 견뎌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나는 열네 살 소년들이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고 반강제로 가망없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상상을 하며 한탄을 하곤 했다. 열네 살 나이에 운명적인 일자리를 부여받는다는 사시은 내가 보기엔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학교 떠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노동 계급 소년이 천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역사니 지리니 하는 웃기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진짜 일을 배우기를 바란다. 노동계급이 보기에 어른이 다 되도록 학교에 남아있다는 것은 한심하고 사내답지 못한 일이다. 집에 매주 1파운드는 갖다줘야 할 열여덟 살 다 큰 사나이가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입고 학교에 나갈뿐더러 숙제를 안했다고 지팡이로 얻어맞기까지 하다니! 열여덟 살 노동 계급 청년이 지팡이로 얻어맞는 걸 자신에게 허락한다는 상상을 해보라! 학교에 있는 또래는 아직 어린애지만 그는 어른이다. 새뮤얼 버틀러의 '모든 목숨의 길'에서 어니스트 폰티펙스는 진짜 인생을 몇 번 슬쩍 들여다본 뒤 자기가 받은 사립학교와 대학에서의 교육을 돌이켜보고는 그게 얼마나 "병적이고 무기력하고 방탕한" 것인지 알게 된다. 노동 계급의 시각으로 보면 중산층의 삶은 병적이고 무기력한 데가 많은 것이다.

연 소득이 400파운드 수준이면서 이 계급에 속한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노릇이었다. 그럴 때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실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론상으로는 하인들에 대해 전부 알고 그들에게 팁 주는 요령까지 다 알았지만, 실제로는 집에 함께 거주하는 하인이 기껏해야 한둘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정장 입는 법과 정찬 주문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양복점이나 번듯한 음식점에 갈 형편이 도무지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사냥하고 승마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말도 없고 사냥할 땅 한 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아야 하급 상류 중산층이 인도에(더 최근엔 케냐나 나이지리아 등에) 매력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군인이나 공직자로 그곳에 간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러 간게 아니었다. 돈은 군인이나 공직자가 버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거기까지 간 것은 예컨대 인도에 가면 말도 싸고 사냥도 공짜로 하고 얼굴 까만 하인들도 얼마든지 둘 수 있어 특권층 노릇을 하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문제들을 따져보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계급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아야 한다. 중산층은 '속물'이라는 말에서 그쳐버리낟면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속물근성이란 것이 일종의 이상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런 근성은 중산층의 자제가 목 씻기와 나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배우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층민'을 멸시하는 법을 배우는 초등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급간 반목이 줄어드는 듯 보이는 이유는 요즘엔 그런 감정이 인쇄물로 잘 표출되지 않아서인데, 그것은 우리 시대가 표현에 인색한 습성을 갖게 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신문뿐 아니라 책까지도 노동 계급인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탓이기도 하다.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느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를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오웰 역시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하지만, 그의 습성이 그들과는 너무 무관한 게 놀랍다. 어쩌다 한번 순전히 허세로 상표를 떼지 않고 시가를 피운 적은 있어도, 치즈를 칼끝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거나 모자를 쓰고 실내에 앉아 있다거나 접시에 고인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그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에서의 예절은 그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들어본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모든 미덕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수프를 소리 내지 않고 마시려고 용을 쓰는 것일까? 이유는 속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몸가짐을 역겨워한다는 것밖에 없다. 노동 계급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하도록 배운 어린 시절의 교육에 아직도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열네댓 살 때의 나는 혐오스러운 어린 속물이었지만 같은 계급의 또래 소년들에 비하면 약과였다. 속물근성이 사라질 줄을 모르며 너무나 세련되고 미묘하게 길러지다시피 하는 곳 치고 영국의 사립학교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사립학교에선 영국의 '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야 졸업한 지 몇 달도 못 돼 다 까먹는다 해도 속물근성은 계속해서 뿌리를 뽑아주지 않는 한 무덤에 갈 때까지 메꽃처럼 들러붙는다.
학교에서 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나보다 집이 부유했다. 내가 비싼 사립학교에 간 것은 순전히 어쩌다 받게 된 장학금 덕분이었다. 하급 상류층이나 성직자, 인도 거주 영국인 관리 등의 자제들이면 대부분 나같은 처지였으니, 그것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일반적인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나는 한편으로는 내 신분에 더 열심히 매달리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보다 부유한 부모를 두고 그런 사실을 내게 명심시켜주던 아이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특권 계급'으로 분류되지 않는 아이는 무조건 멸시했으며, 탐욕스러운 부자들, 특히 최근에 부자가 된 졸부들도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특권 계급 출신이되 돈은 없는 게 가장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급 상류층의 '신조'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큰 위안이 되었고, 제임스 2세의 추종자가 된 듯한 낭만적인 기분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그런 유리벽을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것인 양 대하는 게 유행이다. 물론 계급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누구나 '자신'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안다. 자기 이웃들과는 달리 부나 서열이나 작위 같은 부조리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나는 속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신조'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 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방에서 계급 타파를 위한 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딜가나 자신이 계급 차별을 타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정말로 믿는 선의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계급 타파를 위한 그런 모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아주 심각한 잘못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것들은 때로는 부질없는 짓에 그치고 마는 수도 있지만, 분명한 성과가 나타날 때는 대개 계급적 편견을 '강화'하는 노릇을 한다. 그것은 조금만 생가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무리하게 속도를 높이고 계급간에 불편하고 자연스러운 평등을 강권했으니, 거기서 비롯되는 마찰 때문에 그냥 뒀으면 영영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온갖 감정이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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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수순은 속도를 늦추며 다그치지 않는 것 뿐이다. 스스로를 특권 계급이며 그 자체로 청과상의 심부름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ㄳ보다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훨씬 낫다. 궁극적으로는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보수 회귀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아무튼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는 변화다.

물론 노동 계급 '출신'이면서 이론적이고 딱딱한 문어를 구사하는 유형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로 '남은'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문단의 인텔리가 되어 중산층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유형이거나, 노동당 하원의원 또는 고위 노조 간부가 되는 유형인 것이다. 이 마지막 유형은 세상에 비할 데가 없는 꼴불견이다. 그는 정작 자기 동료들을 위해 싸우라고 선출됐지만, 그 자리는 그에게 오로지 편안한 일자리와 신분 '향상'의 기회일 뿐이다. 그는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와 싸움으로써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남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먼저, 사회주의의 적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적이란 자본주의가 사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워지며 부르르 떠는 사람들을 말한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별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모자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라고 하면 배에 기름기 차고 불경스러운 '진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너무 쉬우며, 전통이나 기본적인 미감을 중시하는 정서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관념에 반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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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