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中..
#1.
이제, 내가 너희에게 발로 뱀을 밟을 권을 주었노니
(......) 그 무엇도 너희를 해할 수 없으리라.
- 누가복음 10장 19절
#2.
2009년 3월 20일, 드디어 목숨을 끊을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방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난방을 끈 다음,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침태 탁자 위에 놓이 수면제 네 통을 집어들었다.
알약을 으깨어 물에 타서 삼키는 대신 한 알씩 그냥 넘기기로 했다.
의도와 실행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으므로,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그만두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알한알 삼킬 때마다, 결심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오 분만에 수면제 네 통이 모두 비었다.
의식을 잃을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라,
도서관에서 가져온 잡지 최신호를 펼쳐 들었다.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 기분 좋은 한 때,
꼭 죽어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알약을 모조리 삼켜버렸으니,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살아오면서 이런 행복한 순간을 맛본 게 한두번도 아니지 않은가.
슬프거나 처참해서, 또는 늘상 우울해서 죽음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지극히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죽겠다는 결정은 아주 단순한 두가지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만약 나의 행동을 설명하는 쪽지를 남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동감할 거라고 확신했다. 이유가 명확햇으므로.
첫번째 이유, 삶은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뻔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그 다음엔 내리막길이다.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친구들.
이 이상 산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고통의 위험만 커질 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보다 철학적인 것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그리고 몸소 경험을 통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최후의 경험-죽음,
아주 다를게 확실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수천년 문명은 자살을 금기로, 혹은
모든 종교적 규범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다.
인간은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사랑이 식어도 함께 지내야할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 국가는 병사와 정치인 그리고 예술가들을 필요로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불의, 탐욕, 비참함, 고독일 뿔인 이러한 혼돈을 창조한 건 바로
신 자신이다.
신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형편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한 피조물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
오히려 이 땅을 거쳐가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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