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Book2022. 2. 1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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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가 그렸어 by 김진형

<프롤로그>
4년 전 딸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우리에게 온 후로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랑의 감정이 솟아났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고 그 감정에 푹 빠져서 한동안 딸에게 몰입해서 지냈던 것 같다. 딸의 말이라면 뭐든지 바보처럼 다 들어주는 소위 '딸바보'가 된 것이다.
어느 날 목말을 태워주다가 갑작스레 무거워진 딸아이의 무게를 느꼈다. 아름다운 이 시간이 앞으로 사무치게 그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아이를 키우며 썼던 육아일기와 사진들을 꺼내들고 퇴근 후 밤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딸과 나의 이야기, 그리고 내 가족의 이야기들을.

<01. 예비 아빠기>
아내가 임신했다. 앞으로 10개월 후에 나는 아빠가 되는 거다. 아직도 마음만은 열엳럽 청춘이라 생각했던 내가 과연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아내의 몸은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나의 어깨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임신 소식. 아빠가 된다는 그 묘한 기쁨을 거침없이 만끽하자!
초음파 사진.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어딘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감동적인 사진이다!
태명 짓기. 10개월 동안 부를 태명, 어렵게 '건강이'로 결정했어. 건강아, 너는 엄마 아빠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야. 건강하게 자라다오~!!
발차기. 첫 태동을 느꼈을 때의 그 환희도 잠시, 아빠라면 나중에 발차기 많이 맞게 될 것이다. 다시 못 느낄 귀여운 태동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
태교 여행. 많이 센치해지신 아내님과 배 속 건강이와 첫 여행을 기다려본다. 제주로 가자!
느낌 아니까. 아주 심한 변비 걸린 느낌? 콧구멍에서 수박 나오는 느낌? 허리르 누가 도끼로 수백 번 찍는 느낌? 기차가 배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 대신 낳아줄 수도 없고...ㅠㅜ 위로가 안되어서 미안하다.
임부 우울증. 임신 호르몬의 영향으로 아내가 예민해질 수 있으니 눈물을 머금고 참아보자. 아내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출산 예정일. 가고 싶은 것을 미루고, 먹고 싶은 것을 미루고, 꾸미는 것을 미루고, 만나는 것을 미루고, 널 만나기 위해서 미뤄둔 것들이 참 많아... 그러니까 넌 미루지말고 빨리 나오렴. 보고싶다!

<02. 아빠 됐어요>
그날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보랏빛 하늘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빠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아기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부모님의 희생으로 내가 자랐다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다. 아기가 예쁘다. 그리고 졸리고 아프고 무겁고 배고프고 힘들다.
진통소리에 기도하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아내와 건강이가 건강하기만 하다면 뭐든 하겠다고 수천 번 맹세했었지.
태어났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열 개씩 이상 없네요! 산모도 건강하세요! 축하드려요! 바로 그날, 우리도 태어났다. 엄마로 그리고 아빠로. 이제는 아빠 차례. 이 두 여자는 내가 지킨다.
첫날 밤. 아빠는 설렘에, 엄마는 산후 통증에, 건강이는 낯섦에, 모두 잠 못 이루던 밤.
목 조심. 아이를 안다보면 뭉클해지기에 잡생각이 많아진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목! 목! 목!
운전이 무서워. 운전 경력 10년 중 가장 불안하고 어려웠던 코스. 산부인과에서 조리원까지.
모유 수유. 남편으로서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자책감. 모유 수유는 못해도 페이크는 가능하다!
울음소리. 아기마다 고유의 울음소리가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면. "아빠, 힘내세요!"라고 사진이 말하고 있다. 이제는 내 감정만, 나만 생각할 수 없다. 아빠라는,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03. 아빠 한 살>
초보 아빠로서 정신없이 기어다니다가 이제는 제법 걸음마를 시작하는 수준이 되었다. 아직은 육아의 최전방이지만 그래도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약간의 외출도 가능해졌으니 아기와 함께 추억을 쌓으러 나간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렇게 언덕이 많았나?
아이 컨택. 눈 뜨는 시간이 정말 짧다. 아주 가끔 눈 떴을 때 놓치지 말고 아이 컨택!
안을 땐 손 조심. 아기보러 오신 손님 여러분, 아기 안을 때는 꼭 손을 씻어주세요!
네일 케어. 얼굴 긁으면 마음이 아파요. 네가 곤히 잠든 사이, 사각사각 조심조심. 너의 첫 네일 케어, 엄마표 네일 케어.
때로는 얄미워. 가끔은 좀 얄밉지만 그래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돼! 트림하고 자야지!
필요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살도 열심히 빼고, 화장도 열심히 배웠다. 아이를 낳고 알았다.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남보다 잘하는게 없어도, 엄마라는 이유 하나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걸.
왜 울어. 쉬 쌌어? 배고파? 졸리니? 안아줘? 왜 울어, 계속.. 이유도 모르게.. 너에겐 울음이 말하는 거라지만 엄마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 걱정하게 돼..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 사랑하고 부딪히고 닮아가고 우리 이렇게 살아하고 있는 중.
손 탄 자장가. 힘들어도 너를 오랫동안 안을 수 있어서 행복해. 후에 이 순간을 그리워하겠지. 그래도 지금은 얼른 자라.
밤이면 밤마다. 모유 수유의 고통은 함께 느낄 수 없지만 새벽 잠 설침은 함께 느낄 수 있다.
백일의 기적. 우리 집에도 백일의 기적이 찾아왔다! 백일동안 고생했어, 여보 그리고 나. 
기어다닌다. 아기가 기어다니게 되면서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안녕, 우리의 평화로웠던 일상.
아빠라고 불러줘. 옹알이 속에 '빠빠'만 섞여도 설렌다. I'm your father. 아빠라고 해보렴.
열 감기. 그날 밤, 어머니가 어릴 적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너 대신 엄마가 아팠으면 좋겠어..
엄마, 엄마! 모든게 처음이라 서툴고, 실수투성이에, 아는 것도 없고, 체력도 많이 약하며, 인내심도 부족한 나에게..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아빠, 아빠! 모든게 처음이라 서툴고, 둔하고, 힘만 넘치고, 마음만 앞서며, 밤이 되어서야 볼 수 있는 이런 나에게.. 아빠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내가 너의 아빠라서 행복해!
아무것도 못하니까. 잘 못 걸으니까 더 안아주게 되고, 말을 못 하니까, 귀를 더 기울이게 된다. 사랑스러운 행동을 해서 사랑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라서 사랑하게 된다는 걸. 아빠가 되어서야 알았다. 아무것도 못해서 더 사랑하게 된다는 걸. 아빠 눈에는 너의 모든게 사랑스러워!

<04. 아빠 두 살>
엄마, 아빠, 맘마, 무(물), 나무, 빵, 까까, 어흥, 할미, 하비, 찌찌, 입, 배꼬(배꼽), 그 외에는 손가락질과 머리 잡아당기기, 빤히 쳐다보기와 울음으로 해결. 어쨌거나 소통이 가능해졌다. 어설프게나마 의사를 전달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야 좀 사람답구나 싶어 감동의 박수를 친다. 이제야 제법 아빠다워진 나에게도 박수를 친다.
모유야 안녕. 엄마도 아기도 마음 아픈 이별, 모유야 이젠 안녕.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울지마,, 마음 또 약해지게. 독해져야 끊을 수 있는 모유. 독해지기 어려운 엄마의 마음.
듣고 있어요. 낮말도 아기가 듣고, 밤말도 아기가 듣는다! 말 조심, 또 말 조심!

<05. 아빠 세 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웃기지마! 아직 아니라고!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엄마 아빠 눈에서 벗어나면 다칠 수 있단다. 나 역시 이제 어엿한 아빠라고 섣불리 방심하고, 아빠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했지만, 우리 서로 세 살 되었다고, 몸이 좀 편해졌다고 방심하지는 말자.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니까, 나의 모습이 곧 너의 모습이니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니까.
그때 그리고 지금.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 보면 그때가 참 귀여웠고. 그때는 껌딱지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가장 가깝게 지냈었고. 그때는 괴로웠지만 지금보다 그때가 더 잘 먹었고. 그때 그리고... 지금. 그때라는 추억이 되어서야 소중함을 알기보다 지금 더 사랑해주자. 
스킨십. 매일매일 나를 안아주는 아이가 있어서 참 좋다. 스킨십은 어른에게도 필요하구나. 가끔은 아빠가 너를 안아주는 게 아니라 네가 아빠를 안아준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는 가르치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06. 아빠 네 살>
배 속에 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안으면 솜털처럼 가벼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네가 자란 만큼 아빠도 함께 성장한 것 같다. 네가 무거워진 만큼 아빠의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진다. 평생을 소년의 감성으로 살려했던 내가, 이제는 어른으로, 그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부모가 된다. 낙지볶음을 좋아하던 그녀가 백김치만 먹게 되고, 항상 귀걸이를 하던 그녀가 아기 볼 찌를까봐 안하게 되고, 운동을 싫어하던 그녀가 12킬로 아기를 들고 뛰게되고, 숫기 없던 그녀가 스스럼 없이 말을 걸게 되고, 어제는 소녀였던 그녀가 오늘은 어른이 되고.. 그렇게 엄마가 된다. 비위도 안 좋던 내가 응가 기저귀를 갈게 되고, 주말이면 늦잠만 잤던 내가 놀아달라는 보챔에 일찍 일어나게 되고, 성질나면 못참는 성격이었던 내가 사진 한장 바라보며 화를 죽이게 되고,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사람을 싫어하던 내가 술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되고, 어제는 소년이었던 내가 오늘은 어른이 되고.. 그렇게 아빠가 된다.
어제는 소년이었던, 어제는 소녀였던 우리가 오늘은 어른이 되고.. 그렇게 부모가 된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익숙함과 소중함. 익숙함에 속아 소중항믈 잃지 말자. 가족은 나에게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니까.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 너를 재우다가 새벽 하늘이 참 예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너를 잘 먹이려다 보니 인내심이 늘게 되었고, 너와 걷다보니 그냥 지나치던 들꽃을 보게 되었고, 너를 가르치려다보니 내가 먼저 조심하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되었어. 네가 자랄 때 나도 자란다는 걸. 너를 키우는게 곧 나를 키우는 거라는 걸. 고마워, 건강이 덕분에 엄마 아빠도 성장하는구나.
부부란 두 반신(半身)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 고흐

<에필로그>
빨리 좀 컸으면 좋겠다.. 기어다녔으면 좋겠다.. 걸어다녔으면 좋겠다.. 대화가 되면 좋겠다.. 조금 조용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조금만, 아주 조금만..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오늘의 너를 더욱 사랑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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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