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Book2019. 7. 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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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티는 삶에 관하여 (허지웅)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타인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나보다 덜할 것이라 새악하지 말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정하며 어느 한 편에만 서면 명쾌해질 것이라 착각하지 말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나는 별일없이 잘 산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검함.
우리는 모두 상처받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영화나 연속극이라도 되는 양 타인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거나, 최소한 보상받으리라 상상한다. 내 상처가 이만큼 크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고 오해받고 있고 너희들이 내게 하는 지적은 모두 그르다, 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착각은 결국 응답받지 못한다.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우리는 모두 별로다.
뉴스를 보다보면 세상의 속살이 드러나 그 추잡함과 헐거움, 촌스러움에 치를 떨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서로 앞다투어 멋지고 잘났고 괜찮고 근사하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 투성이라 초래된 세상이라고 본다. 자신의 흠결을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고쳐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아가 남의 흠결을 공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다.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는다는 건 타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그만큼 더 겹쳐졌다는 의미다. 수많은 인과율과 책임관계 안에서 사람은 나약하고 겉과 속이 다른 모순덩어리가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별로라는 걸 인지하는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다. 무업소다 개인의 선량함이나 역량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제대로 굴러 갈 수 있는 체계가,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더 빨리 가닿을 수 있다. 그건 비관이 아니다. 비전이다.

나는 당신의 후배가 아니다.
나는 좀 빼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깍두기라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

평범한 어른이 되는 법.
인간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로잡힐 과거는 늘어난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죽음 따위는 근사한 문장 안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멀찌감치 초과해버린 과거의 무게에 눌려 버둥거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나이 오십에 누군가는 백 가지를 책임져야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열 가지를 책임지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짊어질 깜냥이 되는 곽의 무게 차이일 뿐 절대량으로 우위를 따질 일은 아니다. 아름답게 나이 먹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피할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책임지지도 짊어지지도 않겠다며 뭐랄까 인류, 라는 단어를 내팽겨쳐버리는 사람들이다. 현대사회라는 것이 운명공동체이다보니 평범한 어른이 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잇값만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지" 같은 말을 떠벌리는 걸 지켜보는 일은 곤욕스럽다.
인간은 그러니까 어차피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 것이다. 그 과거의 크기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짊어질 수 있는 꼭 그만큼씩만을 가지고 살아나가며, 그것이 평범한 어른이다.

고시원으로부터 온 편지.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요, 현주씨.
그러나 그보다 우선은 우리 엄마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다. 우리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노력했다. 힘든 일이다. 나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새끼들 안 챙겼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우리 형제를 길러냈다. 이것은 흡사 슈퍼히어로가 아닌가. 나는 그녀의 크립톤 운석이었다. 나는 그런 지위를 누리기만 했다. 그만한 책임과 의무는 외면했다.
그녀는 우리가 하늘이 내려준 새끼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가 하늘이 내려준 엄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를 한 명의 여자로서 존중하고 아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엄마가 아니라 현주씨라고 불러야겠다 결심했다. 내일 당장 만나야겠다. 그렇게 내 마음을 조금씩 드러내야겠다. 우리 엄마, 아니 현주씨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좋은 사람이다.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행복할 것 같다.
나는 가족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다. 새삼 왜 이럴까. 오늘밤 아주 좋은 형과 가족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다보니, 어떻게 그리됐네.

엄마, 생일.
엄마에게 새 방을 보여주지 못햇다. 한번은 합정동까지 오셨다. 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 내내 왜 또 반지하냐 재킷은 왜 그리 짧냐 아이고 잔소리 잔소리. 기어이 짜증을 부렸다. 엄마가 뭘 해줬다고!
불쌍한 엄마는 발길을 돌렸다. 참 못난 입이고 말이다. 가족은 가족에게 폭력적이다. 객관화해야 한다고 입으로 말했는데 정작 내 입은 그러지 못한다. 밉다. 스스로에게 되게 실망했다. 그 길 위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일이 바쁘고 삶이 피곤하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문자가 왔다. 한밤중이었다. 엄마였다. "음력 10월 14일 양력 11월 11일은 지웅이 엄마의 생일...... 받고 싶은 생일 선물: 예쁜 숄처럼 생긴 목도리. 가격 4만원." 화장실에서 물 틀어놓고, 나는 소리내 엉엉 울었다.
비싼 걸 사주고 싶었다. 백화점에 가야겠따. 회사 후배에게 나 효도 좀 하려는데 뭘 사면 좋겠니 이것저것 물어봤다. 에르메스가 비싸고 버버리가 그나마 조금 싼데 몇십만 원 생각해야 한단다. 그것 참 되게 비싸네.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있으나 마나 한 아버지에게 평생 그런 선물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바보같이.
압구정역에서 엄마를 만났다. 볕이 좋은 날에 엄마는 유난히 예뻤다. 미용실에 가서 장미희 머리로 잘라달라고 했단다. 정말 장미희보다 예뻤다.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하의 고집쟁이 엄마는 결코 내가 원하는 숍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엄마는 백화점 1층에서 기어이 4만 9천원짜리 목도리를 골랐다. 나랑 내 동생이 신이 내린 자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엄마와 커피를 마시고 가로수길을 걷고 다시 커피를 마시고 <아내가 결혼했다>를 봤다. 극장을 나서 모계사회 자바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연애하듯 좋다.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괜찮니, 물었더니 오히려 명확해졌단다. 뼈가 삭도록 일해서 가족 먹여 살리겠단다. 전화를 끊고 한강을 바라보았다. 어둡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밉살맞고 장미희보다 예쁜 엄마가 자꾸 보고 싶었다. 엄마는 나를 자꾸 울게 만든다. 그렇다면 엄마 무릎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봄이 오면
봄은 언제나 아름답다. 내가 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이다. 봄의 따스함은 더위에 약하고 강한 자나 추위에 약하고 강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정하다. 사람의 조건과 규칙들이 하루를 멀다 하고 불온하게 허물어지는 이 세계 아래서, 공정한 모든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짧고 알아채기 어려운 계절의 가장 눈부신 대목은, 그 공정함이 달이 찰수록 깊게 성숙해 나간다는 점이다.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말미로 치달을수록 무디어진다. 가을은 서늘함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쓸쓸하게 죽음으로 돌진하는 계절이다. 그러나 봄의 따스함이란 사그라질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다. 끝으로 갈수록 더욱 따스하게 풍성해지는 것이다. 공정하게 가꾸어지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가장 아름답고 충만해졌을 때, 봄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흡사 절정에서 멎어버린 위대한 음악처럼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봄은 언제나 가장 늦은 봄이다.
가장 아름다운 봄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자취를 감추기 직전의 가장 늦은 봄을 직감하고 그 한나절을 천천히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맞는 건 정말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이건 순전히 내 몸뚱이로 알아챌 수 밖에 없는 어느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통틀어 과연 몇 번이나 그런 행운을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 하루를 발견하기 위해 한 해를 꼬박 준비하고 기다리는지 모른다.

책 읽는 삶에 관하여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하이퍼링크가 없는 웹상의 DB를 상상해보라.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냉소적인 사람이다
실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호소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나의 진심은 너의 진심과 다르고 그것의 공존을 중재하기 위해 법과 제도가 존재한다. 나의 진정성이 타인의 반진정성을 증명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그리고 짜증스럽다.
그런데 요즘 살짝 고민이 생겼다. 나의 진심은 너의 진심과 다르다. 맞다. 그러나 나의 진심과 너의 진심 결국 공히 '진심'인 것이다. 그 개별의 진심들을 모두 싸잡아 무시하는 게 과연 옳은 태도일까.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마냥 긍정하면 바보가 된다. 그것을 마냥 부정하면, 역시 바보가 된다.
너무 많은 비관과 냉소는, 때로는 막연하고 뜨거운 주관보다도 되레 진실을 더욱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이 글을 읽을 여러분은 부디 나보다 나은 미감과 연민을 가지고 세상의 진심들과 겨루어주길 바란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최근의 내가,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의 내가 천착할 주제란 고민할 것도 없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물론 내가 말하는 좋고 나은 사람과 당신이 생각하는 좋고 나은 사람은 다를 겁니다. 틀린 건 아니고 다를 거예요.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계산된 위악을 부리지 않고 돈 위에 더 많은 돈을 쌓으려 하기보다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며 인간관계의 정치를 위해 신뢰를 가장하지 않고 미래의 무더기보다 현실의 한줌을 아끼면서 천박한 것을 천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되 네 편과 내 편을 종횡으로 나누어 다투고 분쟁하는 진영논리의 달콤함에 함몰되지 않길 하루하루 소망하는 자다.

부적응자들의 지옥
한국의 군대조직은 그 자체로 이미 방안의 코끼리고 항체가 만들어질 수 없는 바이러스다. 병적 위계와 폭력적인 의식체계를 배워나가는 남한 남성의 필수 사회교육기관이다. 필요에 의한 살인을 가르치는 곳이다. 젊은이를 애국과 의무의 이름으로 저렴하게 착취하며 병증과 굴종과 비합리로 유지되는 공간이다. 세상은 한국 군대라느 비정상 안에서 정상인으로 잘 버텨내며 그 안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셔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을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옥소리 사태 -1/N의 폭력
이토록 교회가 많은 나라에서 나 같은 냉담자마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교훈이 쉽게 간과된다는 건 괴상한 노릇이다.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대목은 이 불행한 여인에게 연민을 가지라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목에서 방점은 '먼저'에 찍히는 것이다.
백 개의 돌팔매 안에 돌멩이 하나로 숨어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1/N이라는 익명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이 타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알고도 책임질 수 있으면 돌을 던지라는 말이다. 그럴 수 있는가?

마이클 잭슨, 괴물과 우상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록키는 어떻게 스탤론을 구원했나
시합을 만류하는 에이드리언에게 발보아는 말했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발로 서 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
집안에 작은 코끼리가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게 별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코끼리는 점점 더 자란다. 그리고 급기야 집에 꼭 끼일 정도로 몸집이 커져버리낟. 이때가 되면 코끼리는 문제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러나 코끼리가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걸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 자체를 부수어버리지 않는 이상 코끼리를 빼낼 방법이 없을 것 같잖아. 그냥 같이 사는 게 속 편해요. 못 본 척 지나간다.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된다. 어차피 다 알고 있거든? 혼자 똑똑한 척 하지 마. 그렇게, 코끼리는 집의 일부가 되고야 만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잠깐 후회하고 금세 망각하고 다시 되풀이된다. 나와 나의 행동을 분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열함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부모와 형제자매를 개별적인 인격체로 객관화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실패담을 경청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두세마디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가득 차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부터,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찍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모순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왜 일관되지 않으냐고 타박한다. 상대의 굴곡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은 자연스레 단 두세 마디 인상비평의 소재가 되기를 거듭한다. 나쁜 놈이거나, 착한 놈이거나.

<레 미레자블>은 힐링 영화인가
<레 미레자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벌이는 신념의 대결, 장발장과 코제트-마리우스의 마지막 해후는 무엇을 의미하나.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에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막 연애를 끝낸 모든 이들에게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연애든, 고용이든, 혈연이든 마찬가지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데미지>, 망가진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모두에게 일생 단 한번의 소중한 사람이 있죠. 그게 나에겐 아들이었고 당신에겐 안나였어요. 그런데 과연 안나에게는 그게 누구였을까요?" 스티븐에게 안나는 평생의 바로 그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나에게 스티븐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파국은 자초되고 계획되었으며 예상된 것이었다.
자신이 망가져 있었다는 이유로 상대를 망가뜨리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던 탈출구로 유유히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스티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는 몸을 내던질 수 밖에 없었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
<록키>는 지난 세월을 꼰대들과 불화하며 답답하게 보낸 서른 살의 한 남자가 세상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온전하게 증명해내는 이야기다. 그의 해답은 이기든 지든 끝까지 자기 힘으로 버티어내는 데 있었다.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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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CIB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