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 by 조지 오웰 / 르포르타주
이런 점을 사람들은 늘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탄광을 생각할 때 깊이와 더위를, 암흑을, 그리고 채벽을 파내는 시커메진 사람을 생각하되, 기어서 몇 키로미터를 왔다갔다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중산층 중에는 '하층민'은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기차를 타고 가다 어쩌다 캐러밴 거주지를 보면 다짜고짜 저런 데 사는 사람들은 원해서 저러는 거라고 여기는 이들이 아직 있는 게 분명하다. 요즘 나는 그런 유의 사람들과는 절대 언쟁을 하지 않는다. 한편 캐러밴 거주자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반 주택 못지 않은 집세를 내고 있다. ... 그렇다면 확실히 누군가는 캐러밴 때문에 재미를 보고 있다는 것 아닌가! 아무튼 그들이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은 주택 부족 때문이지 빈곤이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다.
배에 기름 찬 부르주아들은 슬럼 거주민들이 스스로 좋아서 불결함과 혼잡함을 원하다고 믿고 싶어하는데, 그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번듯한 집을 줘보라.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번듯하게 가꾸는 법을 금세 배울 것이다. 나아가 근사한 집을 주면, 그들은 그 수준에 맞춰 보다 자존적이고 청결한 생활을 해나갈 것이고, 아이들은 더 나은 삶을 시작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실업자 수가 200만이라는 수치 인용을 보면, 200만 명이 실직했으며 그 나머지 인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쉽다. 나만 해도 최근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왔다고 인정해야겠다. ...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과소 추정이었다. 우선 실업 통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실업수당을 타는 이들 뿐이며, 그들은 대개 한 가계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실업 가장의 피부양인들은 그들 역시 별도의 수당을 타지 않는 한 수치에 반영되지 않는다.
'자산조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 제도 때문에 노인들이, 그 중에도 때로는 병석에 누워있던 노인들이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실업이 남자든 여자든 모두를, 특히 여자보다는 남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무기력감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다 해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러다 처음으로 가까운 주거지에서 실업자들을 보았을 때, 몹시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실직한 것을 '수치스러워' 한다는 사실이었다. ... 그 당시에는 누구도 실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실업이 계속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모두 같은 처지가 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말하자면 여생을 실업수당에 의존하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들이 잔뜩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감탄스럽고 심지어 희망적이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파탄을 겪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노동 계급은 중산층처럼 빈곤의 부담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 즉, 그들은 일자리를 잃는다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들은 어떤 면에서는 생각만큼 사정이 나쁜 게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정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생각 이상으로 그렇다. 수많은 가족이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 제도가 깨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긴축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운명에 발악하기보다는 생활수준을 낮춤으로써 상황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겉으로나마 보이고 있는 적응은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혁명적으로 변한 것도 자존심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노여움을 참고, '피시 앤드 칩스' 수준에서 그럭저럭 견뎌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나는 열네 살 소년들이 배울 기회를 박탈당하고 반강제로 가망없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상상을 하며 한탄을 하곤 했다. 열네 살 나이에 운명적인 일자리를 부여받는다는 사시은 내가 보기엔 끔찍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학교 떠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는 노동 계급 소년이 천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역사니 지리니 하는 웃기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진짜 일을 배우기를 바란다. 노동계급이 보기에 어른이 다 되도록 학교에 남아있다는 것은 한심하고 사내답지 못한 일이다. 집에 매주 1파운드는 갖다줘야 할 열여덟 살 다 큰 사나이가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입고 학교에 나갈뿐더러 숙제를 안했다고 지팡이로 얻어맞기까지 하다니! 열여덟 살 노동 계급 청년이 지팡이로 얻어맞는 걸 자신에게 허락한다는 상상을 해보라! 학교에 있는 또래는 아직 어린애지만 그는 어른이다. 새뮤얼 버틀러의 '모든 목숨의 길'에서 어니스트 폰티펙스는 진짜 인생을 몇 번 슬쩍 들여다본 뒤 자기가 받은 사립학교와 대학에서의 교육을 돌이켜보고는 그게 얼마나 "병적이고 무기력하고 방탕한" 것인지 알게 된다. 노동 계급의 시각으로 보면 중산층의 삶은 병적이고 무기력한 데가 많은 것이다.
연 소득이 400파운드 수준이면서 이 계급에 속한다는 건 참으로 피곤한 노릇이었다. 그럴 때 상류층에 속한다는 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사실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론상으로는 하인들에 대해 전부 알고 그들에게 팁 주는 요령까지 다 알았지만, 실제로는 집에 함께 거주하는 하인이 기껏해야 한둘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정장 입는 법과 정찬 주문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양복점이나 번듯한 음식점에 갈 형편이 도무지 아니었다. 이론상으로는 사냥하고 승마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말도 없고 사냥할 땅 한 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아야 하급 상류 중산층이 인도에(더 최근엔 케냐나 나이지리아 등에) 매력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군인이나 공직자로 그곳에 간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러 간게 아니었다. 돈은 군인이나 공직자가 버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거기까지 간 것은 예컨대 인도에 가면 말도 싸고 사냥도 공짜로 하고 얼굴 까만 하인들도 얼마든지 둘 수 있어 특권층 노릇을 하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문제들을 따져보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계급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아야 한다. 중산층은 '속물'이라는 말에서 그쳐버리낟면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속물근성이란 것이 일종의 이상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런 근성은 중산층의 자제가 목 씻기와 나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배우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층민'을 멸시하는 법을 배우는 초등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급간 반목이 줄어드는 듯 보이는 이유는 요즘엔 그런 감정이 인쇄물로 잘 표출되지 않아서인데, 그것은 우리 시대가 표현에 인색한 습성을 갖게 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신문뿐 아니라 책까지도 노동 계급인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탓이기도 하다.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느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를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오웰 역시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하지만, 그의 습성이 그들과는 너무 무관한 게 놀랍다. 어쩌다 한번 순전히 허세로 상표를 떼지 않고 시가를 피운 적은 있어도, 치즈를 칼끝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거나 모자를 쓰고 실내에 앉아 있다거나 접시에 고인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은 그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식탁에서의 예절은 그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한 시간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들어본 적은 여러 번 있어도,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모든 미덕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수프를 소리 내지 않고 마시려고 용을 쓰는 것일까? 이유는 속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몸가짐을 역겨워한다는 것밖에 없다. 노동 계급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하도록 배운 어린 시절의 교육에 아직도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열네댓 살 때의 나는 혐오스러운 어린 속물이었지만 같은 계급의 또래 소년들에 비하면 약과였다. 속물근성이 사라질 줄을 모르며 너무나 세련되고 미묘하게 길러지다시피 하는 곳 치고 영국의 사립학교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사립학교에선 영국의 '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야 졸업한 지 몇 달도 못 돼 다 까먹는다 해도 속물근성은 계속해서 뿌리를 뽑아주지 않는 한 무덤에 갈 때까지 메꽃처럼 들러붙는다. 학교에서 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나보다 집이 부유했다. 내가 비싼 사립학교에 간 것은 순전히 어쩌다 받게 된 장학금 덕분이었다. 하급 상류층이나 성직자, 인도 거주 영국인 관리 등의 자제들이면 대부분 나같은 처지였으니, 그것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일반적인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나는 한편으로는 내 신분에 더 열심히 매달리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보다 부유한 부모를 두고 그런 사실을 내게 명심시켜주던 아이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특권 계급'으로 분류되지 않는 아이는 무조건 멸시했으며, 탐욕스러운 부자들, 특히 최근에 부자가 된 졸부들도 미워했다. 그래서 나는 특권 계급 출신이되 돈은 없는 게 가장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급 상류층의 '신조'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큰 위안이 되었고, 제임스 2세의 추종자가 된 듯한 낭만적인 기분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그런 유리벽을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것인 양 대하는 게 유행이다. 물론 계급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동시에 누구나 '자신'은 무슨 신기한 수가 있는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예외인 악덕이다.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은 적어도 '자신'만큼은 계급적 불의를 당연히 벗어나 있는 줄 안다. 자기 이웃들과는 달리 부나 서열이나 작위 같은 부조리를 꿰뚫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은 '나는 속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신조'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그게 엉터리라는 것을 안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 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방에서 계급 타파를 위한 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딜가나 자신이 계급 차별을 타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정말로 믿는 선의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계급 타파를 위한 그런 모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아주 심각한 잘못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것들은 때로는 부질없는 짓에 그치고 마는 수도 있지만, 분명한 성과가 나타날 때는 대개 계급적 편견을 '강화'하는 노릇을 한다. 그것은 조금만 생가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무리하게 속도를 높이고 계급간에 불편하고 자연스러운 평등을 강권했으니, 거기서 비롯되는 마찰 때문에 그냥 뒀으면 영영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온갖 감정이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 현명한 수순은 속도를 늦추며 다그치지 않는 것 뿐이다. 스스로를 특권 계급이며 그 자체로 청과상의 심부름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ㄳ보다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훨씬 낫다. 궁극적으로는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보수 회귀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아무튼 생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는 변화다.
물론 노동 계급 '출신'이면서 이론적이고 딱딱한 문어를 구사하는 유형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로 '남은' 사람이 절대 아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문단의 인텔리가 되어 중산층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유형이거나, 노동당 하원의원 또는 고위 노조 간부가 되는 유형인 것이다. 이 마지막 유형은 세상에 비할 데가 없는 꼴불견이다. 그는 정작 자기 동료들을 위해 싸우라고 선출됐지만, 그 자리는 그에게 오로지 편안한 일자리와 신분 '향상'의 기회일 뿐이다. 그는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와 싸움으로써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남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먼저, 사회주의의 적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적이란 자본주의가 사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워지며 부르르 떠는 사람들을 말한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별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모자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라고 하면 배에 기름기 차고 불경스러운 '진보'라는 관념을 떠올리기 너무 쉬우며, 전통이나 기본적인 미감을 중시하는 정서를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관념에 반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임경선) 사람들은 보통 '나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무엇을 구하는가'의 답을 찾기 위해 머리 싸매고 자아 찾기를 하고, 이것저것 건드려보곤 해. 막상 해보니 '어라? 이게 아니었나?' 싶으면 또다른 것을 찾아보고... ...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반대방법이 낫다고 봐. '하고 싶은 걸 찾기'보다 '하기 실흔 걸 하지 않기'부터 시작하는 거지. 왜냐, '좋음'보다 '싫음'의 감정이 더 직감적이고 본능적이고 정직해서야. '하기 싫은 것 /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 이런 것들을 하나둘 멀리 하다보면 내가 뭘 원하는지가 절로 선명해져. 글쓰기로 치면 일단 손 가는대로 편하게 막 써놓은 후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직감적으로 가지치기하는 거지. 그러면 글이 명료해지면서 내가 애초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분명해지지. 더 나아가, 직감적으로 '아, 싫다'라고 느끼면 나를 그들로부터 격리해주는 것이 가장 본질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고 생각해.
(요조) 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 어떤 솔직함은 못됐다는 거 언니도 아시죠. 타인이 민망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타인이 상처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누군가는 솔직이라는 무기를 이용해요. 반면 누군가는 반대로 타인의 상처를 희석시켜주려고 아무도 묻지 않은 자신의 실패를 일부러 드러내면서 솔직을 사용하죠.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이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끝끝내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요.
(임경선) 나에게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일'은 그저... 원래 멋졌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게 바로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일인데.
(요조) 아무튼 사랑으로 엮인 관계 안에 계란처럼 비밀이 있다면 다들 조심조심했으면 좋겠어요. 뭐가 들었는지 일일이 바닥에 깨뜨리면서 이게 사랑이야! 라고 외치는 바보짓은 제발 좀 멈추고요.
(요조) 꽃은 인간의 애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애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봐도 봐도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멀리서 보면 화사하고 아름답고 청초한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정말 야하고, 음흉하고.
(임경선) 혹시 영화 <컨택트>를 본 적 있니? 원작소설의 제목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지. 한 과학자가 자신의 미래에 닥칠 어떤 불행에 대해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는데, 그 불행은 박완서 작가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아주 미량의 감미로움조차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슬픈 일이야.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나중에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정해진 수순대로 담담하게 걸어가면서, 그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행복을 한껏 끌어안아. 마치 훗날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모른다는 듯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는 고통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어떤 고요함을 보여주었지. 그래서 보는 사람에겐 오히려 더 예리한 통증과 울렁거림이 여운으로 남더라. ... 난 '어차피'와 '다 똑같아'라는 말 그 자체에도 반대하는 입장잉. 그것은 애초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차단하고, '안 좋아짐'을 기정사실로 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단수낳게 하향평준화시키는 단어라고 생각해.
(임경선) 나는 '비겁한' 사람이 싫어. ... 비검함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어. 나는 비겁한 사람이란 우선 자기 자신과의 문제가 아직 해결이 되지 않은 사람 같아. 스스로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해소하거나 해결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과거의 상처가 있어도 그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드하거나 아물게 하려고 애쓰는 대신, 남을 탓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만 하는 느낌이야. 일단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정직'하지도 못해. 자기 자신한테 정직하지 못하니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뒤틀리고 꼬인 모습을 보여.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 가령 자기나 주위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 리트머스지 테스트처럼 그 사람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 같아.
(임경선) '대외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서로에게 '언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특히나 같이 살고 있다면 참지 말고, 자신이 솔직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갈등을 겪는 게 힘겹고 두려우니까 그냥 적당히 맞추면서 넘기거나, 핵심을 피하거나, 익숙함으로 산다고 체념하거나, 남편하게 다 맞춰주는 '너그러운 엄마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격한 싸움이나 피눈물과 절망감이 동반된다고 해도, 이 사람에게만은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늘 다짐해.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임경선) 상대가 원하는대로 하기 위해 내가 무리해서는 안돼.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진리지. 내가 나를 억누르고 상대가 원하는 바대로 하게 두면,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요구가 부당해 보인다면, 내 안에 분노가 쌓이게 돼. 의무감에서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그 상대를 좋아할 수가 없어.
(요조) 여태 해왔던 자신의 일을 돌연 그만두고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만 용기가 아니라, 여태 해오던 일을 앞으로도, 가능한 오래, 변함없이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재조정하는 것도 정말 큰 결단의 태도인 것 같아요. 말하자면 자신의 현실적인 한계를 직시하는 용기인 것이죠.
(임경선) 오랜 상처를 그냥 나의 일부로서 가지고 살자고 결기있게, 밝게, 체념할 줄 알아야 해. 놓아줄 건 놓아주고, 보내줄 건 보내주고, 훌훌 털 거 다 털어버려야 하는 시기야. ... 몇 살이 되어도 고민하는 것은 좋은 거야. 고민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고민을 하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찾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요조) 하나의 통일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좇아가며 우리는 타인과 약속을 하고, 비행기나 영화 예매를 하고, 잘 시간을 정하고, 일어날 시간을 정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자기 인생에서는 제각각의 시계를 차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장강명 작가님이나 박산호 번역가님처럼 자신에게 남아 있는 전 생애를 추정해서 계산하는 시계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니나 저처럼 1년 정도의 시간만 계산이 가능한 시계를 차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임경선)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 당신은 그게 진짜 질문이 아니라고 지적할지도-정확한 지적이다-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질문이 성립하겠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질문이 되지도 않는다. 얼마나 사랑할지, 제어가 가능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제어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대신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으나, 사랑만은 아니다.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요조) 제가 인류에 느끼고 있는 가장 서글픈 귀여움 중에 하나는 대체로 인간은 울다가도, 절망가다가도 배고픔을 느낀다는 거예요. 얼른 빵을 굽고 달콤한 잼을 준비하고 차가운 두유를 아끼는 잔에 따라야지.
(요조) 똑같이 비슷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매 순간 공들여 임하는 사람의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윤이 나는가봐요.
(임경선) 노력하는 사람이 왜 멋진 줄 아니? 다른 멋진 사람을 보고 '멋지다'라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인정할 수 있어서 그래. 너의 노력하는 모습과 노력하지만 그거을 겉으로 굳이 티내지 않는 모습이 꽤 멋있다고 생각해.
(요조) 나 정도면 제법 삶을 유연하게 살고 있다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면 지금의 나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내심 생각했거든요. 사실 누구나 저처럼 생각할 거예요. 세상은 자고로 이런거다, 라는 지론이 다들 자기가 살아온 삶을 통해 두툼해진 채로 우리는 어른이 되잖아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는 타인들을 그다지 설득하고자 하지도 않죠. 보통은 근야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뿐이에요. 저 사람은 나랑 생각하는 게 다르네, 하고 거기서 그냥 끝. ... '나는 태어날 때부터 행복이라는 대전제 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 기억하고 싶다. 더이상 자잘하게 행복을 구체화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면 나는 불행까지도 하나하나 느껴야 할 텐데 그게 싫다. 나는 아픈 게 싫다.' ... 이제는 행복이라는 걸 끼니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아무리 꽉꽉 배부르게 먹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또 어김없이 찾아오는 허기처럼 최대한 맛있는 거 먹고 배부름을 잠깐 만끽하고 다시 배가 고프면 또 맛있는 걸 찾아헤매는 식으로 행복을 다루고 싶어요.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며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도무지 비교할 길이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버녿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pity)이라는 단어는 고통 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 누군가를 동정 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co-sentiment)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 기술을 지칭한다. 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소련군 사진을 찍으며 그녀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그동안만은 연속극처럼 계속되었던 그녀의 꿈이 중단되어 그녀는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탱크로 무장한 소련군이 그녀에게 평온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축제가 끝난 지금, 그녀는 다시 그녀의 밤이 두려워졌고 밤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음식 값을 치르고 레스토랑을 나와서 더욱더 감미로워지는 우울에 빠져 거리를 산책했다. 테레자와 함께 산 칠 년이라는 세월은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 시절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한느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어머니는 테레자에게 어머니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며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다. 아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여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테레자는 삶의 최고 가치는 모성애이고 모성애란 큰 희생이라고 믿었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그런 모든 행동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내팽개치려는 유일하고 격렬한 몸짓이었다. 아홉 구혼자가 그녀를 둘러싸고 무릎을 꿇던 시절에 어머니는 맨살이 드러날까 조바심을 내던 여자였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기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는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내가 보기에 테레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멀리 내팽개쳤던 어머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따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그래서 토마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자기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외과 수술은 의사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근본 수준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맞닿는 한계까지 고양했다. 누군가 사람의 두개골을 강력하게 내리친다면, 그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숨쉬기를 영원히 멈출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간에 숨쉬기를 멈출 것이다. 이 살인은 조금 나중에 신이 손수 해결할 일을 앞당겼을 따름이다. 신이 살인은 예측했을 테지만 아마도 외과 수술은 예측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신은 자신이 발명해서 조심스레 피부로 감싸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은폐하고 봉합한 체제 내부에 인간이 감히 손을 집어넣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토마시는 처음으로 마취 상태에서 축 늘어진 환자의 피부에 메스를 대고 확고한 힘을 가해 그 피부를 찢고 다시 정확한 솜씨로 봉합하면서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신성모독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필경 이런 점 때문이었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비극을 어깨에 걸머졌던 그가(그는 신의 아들이자 추락한 천사였다) 왜 이제는 고상한 것(신과 천사들)이 아니라 똥 때문에 심판받아야만 했을까? 가장 고상한 비극과 갖아 일상적 사건이 이토록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한 것일까? 현기증 날 정도로 근접하다? 근접성이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일까? 그렇고 말고. 북극이 남극에 거의 닿을 정도로 근접한다면 지구는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현기증 나는 진공 속에 놓여 추락의 유혹에 빠질 것이다.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똥을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해 생명을 바친 독일인들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 그렇다, 이들은 멍청한 짓을 위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도 없고 보편적 결과도 낳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생각 중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테레자의 영혼 속에서 싹텄다.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낫다는 것이다. 테레자는 자기 자신이나 토마시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적어도 여러 형태 중에서 최상의 경우라도)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 역사의 이러한 기형태는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꾀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본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시느이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가 지닌 개의 우주를 수락했고 그것을 압수하고 싶지 않았으며 그의 은밀한 성향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녀가 개를 키운 것은 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남편이 부인을,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단지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함께 살 수 있도록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점도 있다. 개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사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 주길 기대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업서.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 테레자는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조합장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일 분 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 농담은 반복된다 해도 그 재미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전원시의 맥락에서는 유머조차도 반복의 달콤한 법칙에 따른다.